지난 7일이 24절기의 11번째 소서小暑였고 11일 오늘이 초복, 21일은 중복입니다. 그런데 삼복이 스물네 번의 절후에 속한다 여기는 분도 계시지만 기실 아닙니다. 고래로 몸과 마음이 지치기 쉬운 한여름에 보양하라는 일종의 잡절雜節입니다. 겨울철에 이런 ‘복날’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시면 자명한 일입니다. 아무튼 지난 3년은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올해는 제철에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나 선풍기, 냉장고 등 냉방기기가 전무했던 조선시대에 염천 여행은 생고생, 극역이었을 터. 실제로 당시는 봄과 가을에 유람하고 여름에는 가급적 집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선비들은 유람기나 산수기 같은 책을 읽거나 집안의 산수화나 부채 그림을 보면서 무더위를 쫓았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을 일컫는 성어가 ‘와유산수臥遊山水’입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누울 와臥’는 눈을 아래로 깐 형상의 신臣과 사람 인人이 결합한 자입니다. ‘유遊’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뜻하는데 ‘와유’는 방바닥에 누워서 아이처럼 뒹굴거린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산수’는 자연 경치를 말하는 것이지요. 묶어보면 ‘집안의 방바닥에 누워서 벽에 걸린 산수화를 감상한다!“는 사자성어입니다.  

서양에서는 풍경화가 전통적으로 중요한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종교나 귀족의 회화가 대세였는데 19세기 후반 모네, 시슬레, 고흐, 세잔 등의 인상파를 거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원방각- 그 세계관의 진원지 자체로 유사 이래 매우 중시해왔습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절조가 굳세어 숨어 사는) 유인幽人의 집안 장식은 지극히 정교하다.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로 도배를 하고, 문미門楣- 창문 위 가로로 댄 나무 그 위쪽에는 엷은 먹으로 그린 가로 폭이 긴 산수화가 붙었다. 방문 옆 벽에는 고목, 대나무와 돌을 그리거나 시를 써놓았다. 방안에는 서가 두 개를 놓아 1천 3, 4백 권의 책을 꽂았다. - 다산 정약용『제황상유인첩』부분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1762-1836)- 다산은 주막의 봉놋방 서당에서 황상(1788-1863)을 만났는데 일취월장 시문을 짓고, 경전을 이해하는 녀석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비록 양반가 자제가 아니어서 과거를 볼 수 없지만 평생 부지런히 공부하라며 독려했습니다. 1805년 황상은『주역』의 한 구절이 마음에 자꾸 끌린다며 스승에게 그 은자들의 삶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밟는 길이 평탄하니 유인이라야 곧고도 길하다”(이괘履卦 구이九二 효사爻辭) 다산은 밤새 글 한 편을 지어 답했는데 바로 ‘황상에게 주는 유인들의 집과 삶에 관한 글’입니다. 다산이 말하는 횡폭의 산수화- 그 화폭에 그려진 ‘산천’보다는 온 ‘자연’을 가까이 두고 사랑하라는 권면입니다. ‘산수화’가 자연을 모방하고 재현한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그 정신적 가치를 표상한 것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와유산수臥遊山水」(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동양 산수화 이론의 핵심인 ‘와유론’을 처음 거론한 이는 중국 남조 유송劉宋의 화가이자 미술이론가였던 종병宗炳(375-443)입니다. 그는 평소 명산 관광을 즐겼으나 노년에 원행하기 어려워지자 산하를 그려, 벽에 붙이고 누워서 회억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마치 지금처럼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뒤적이듯 말입니다. 1839년 폭스 탤벗이 사진기를 발명하기 이전에는 회화와 판화, 드로잉이 ‘회상’의 역할을 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산수의 멋과 맛을 가장 잘 아는 문사로 꼽히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편지글,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올가 토가르추크(1962- ) 소설『방랑자들』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이번 ‘글자그림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부디 자연 그 산수와 진정 하나 되는 삼복 여행 되시길 비손합니다.

낭떠러지와 정상을 뒤져 오르고 구름과 달을 뒤쫓아 가노라면 절로 마음에 맞을 뿐만 아니라 내게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네. 내게는 산천이 진실로 좋은 벗이자, 훌륭한 위원이라오.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서대전고,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전MBC와 TJB대전방송, STB상생방송에서 프로듀서(1987-2014)를 역임했다.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부문 입선(2020) /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 / 제29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특선(2023): 제28회 같은 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했다. 산문집『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 『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를 펴냈고, 현재 충북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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