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의 성지’로 불리는 충북 영동은 우리나라 ‘감’의 주산지입니다. 물론 제철의 복숭아와 포도, 자두 등속도 맛과 품질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1년 내내 함께하는 과일이 바로 감입니다. 봄철의 감꽃으로 팔찌나 목걸이를 만들고 늦가을에는 홍시, 겨울에는 곶감으로 먹으니 말입니다. 그런 유년의 기억이 아련한 고향으로 귀향한 지 9년 차인데 해마다 이맘때면 허영자 시인의 「감」을 애송합니다. 자연과 사람의 조화 그 한뉘를 절묘하게 ‘감’을 잡아 읊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허영자 詩 「감」(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허영자 詩 「감」(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아침 일찍부터 플라타너스 그늘에 모여 참새처럼 지저귀던 아이들은 노란 버스를 타고 계성유치원으로 가고 / 나는 고개를 팍 꺾은 채 후진하여 회사로 간다 // 가을이다 – 이시영(1949- )「그늘」전문

‘그늘’은 양지, 양달의 반대말로 음지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늘은 햇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지만 그림자처럼 만물이 빚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유치원생들의 ‘그늘’을 꿈과 희망의 출발지로 여기면서 정작 자신은 후진하여 스스로 갇히는 ‘회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과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일생의 본령을 적시한 것입니다.

외길의 인생은 늘 그늘로 돌아가고, 다시 출발하는 운명입니다. 온 것들이 죄다 뒤섞인 이승과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는 저승 사이에 저마다의 ‘그승’을 살아갑니다. 해서 그늘과 그승은 짝패가 되는 현묘한 순우리말입니다. 오늘이 늘 오는 날이라면 그늘은 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타당합니다. 하루는 작은 일생- 쇼펜하우어의 정언이 온당하다면 가을은 한평생의 황혼기가 맞습니다.

이제는 / 밀물이 좋다 / 더 / 가득한 때를 바라지 않으리라 / 갯벌에 드러난 추한 상처들 / 다 내 것이고 / 휑하게 뚫린 절망의 공간 또한 / 내 것이니 / 나를 이 음습한 바닷가에 그냥 있게 / 내버려 두라 - 이수익(1942- )「이제는」전문      

밀물 때의 왕성한 파도 소리를 거절한 썰물의 사유- 시인은 북적거리던 피서객들이 빠져나간 가을 바닷가에 홀로 서 있습니다. 저 중국 송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시구입니다. 천고풍경철天高風景澈- 해변은 소슬한 바람에 구름이 밀려난 듯 하늘은 높고 그 아래 경치는 맑기 그지없습니다. 하여 썰물의 그 갯벌은 더욱 선명하게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잔돌과 침적토, 모래들이 뒤섞여 황량한 개땅-

‘개땅쇠’는 그곳에 사는 서민들이라는 뜻으로 ‘절망의 공간’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 민중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비록 그늘지고, 축축한 그 음습의 땅이지만 깜냥 애면글면 살아가는 사람들- 시인은 단호하게 외칩니다. 그냥, 그저 내버려 두라! 세상 어디가, 무엇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갯벌이 삶의 진정한 본새이자 회귀점이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허영자 詩 「감」(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허영자 詩 「감」(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이제 그 누구도 붉은 단감으로 익어가는 가을- 봄날의 떫고 비리던 감이 해와 달의 계절 속에 부대끼며 가을에 이르면 홍시가 되듯 인생도 그럴 것입니다. 모쪼록 봄과 여름의 노고가 헛되지 않는 알찬 결실의 가을 마중하시길 비손합니다.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서대전고,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전MBC와 TJB대전방송, STB상생방송에서 프로듀서(1987-2014)를 역임했다.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부문 입선(2020) /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 / 제29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특선(2023): 제28회 같은 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했다. 산문집 『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 『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를 펴냈고, 현재 충북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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