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지상(敎育至上), 중앙 심사부대의 우열은 간부의 우열에 비례한다.- 이진삼 -1990년 9월, 육군대학 초도순시차 방문했다. 순시를 마치고, 강당 연단 위에 내가 볼 수 있도록 1972년 1월 23일에 졸업한 나의 육군대학 성적이 놓여 있었다.“육군대학총장이 나를 기분 좋게 하려고 졸업성적을 갖다 놓았는데 내가 왜 성적이 좋았는지 교관들에게 물어보겠다. 답변을 듣고 싶다.”몇몇 교관들이 일반론적인 답변만을 하니 대학총장이 “답변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상금 걸어 놓았는데! 내가 머리가 좋았기 때문도 아니고 교관들에게
혼돈의 시기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을 완수한 후 민정에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고 공약을 했다. 국력을 키우고 부강하게 만든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집권 기간의 절반 즈음에 유신헌법을 만들어 나라를 더 발전시키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유신’이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직접선거제’를 ‘간접선거제’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7년 후 유신체제는 무너졌고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1979년 10월 18일, 경제가 침체된 부산과 마산에서는 참다못한 시민들이 봉기했다. 이른바 ‘부마항쟁’으로 일컬
샛길에서 나와때를 기다렸다. 내 꿈은 전투부대 전투군인으로 기회만 살피고 있었다. 남들은 그 좋은 부대를 왜 나오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내 길은 원래 그 길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방첩대에서 특공대장, 파월 기동대장, 부대 대공과장, 사단 보안부대장, 보안사령부 인사과장까지 7년의 기간은 샛길이었다. 화려한 버섯일수록 독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는 내게 있어 화려한 독버섯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 10월부터 2년 예정인 직책을 사령관에게 사양하고 1971년 8월 10개월 보직을 끝으로 보안사령부를
공수부대 마크가 아깝네1970년 10월 15일, 소령으로 8사단 보안부대장에서 보안사령부 인사과장으로 명령을 받았다. 1970년 10월 14일 오전 이‧취임식을 마치고 나자 5군단 보안부대장 김원태 대령이 내게 5군단장에게 인사드리고 떠날 것을 제안했다. 신고나 인사를 꼭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역 군단장을 예의상 찾아보기로 했다. 당시 군단장은 이병형 장군으로 6·25전쟁 때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사실 군단장은 사단 보안부대장이 어디로 가든 관심 없는 직책이다. 군단장이 식사하러 갈 때 식당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인사하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이다.- 다산 정약용 -8사단 보안부대장산짐승은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지 않는다. 먹이를 받아먹으면 산짐승이 아니라 가축이 된다. 나는 산짐승이었다. 어디에도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 내가 추구한 삶은 오직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애국과 애족이다.당면한 애국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요, 군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애족이다. 다행히 보안(방첩)부대이지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했다는 점에 있어서 긍지와
윤필용과 김재규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윤필용 준장과 김재규 소장,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육사 기수로는 2기인 김 장군이 8기인 윤 장군보다 선배였지만 나이는 별 차이가 없었다.윤 장군 입장에서는 능력과 인품 특히 청렴도 등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보안사령관을 맡아 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 통수권자를 제대로 보좌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반면 김 장군은 자신이 육사 선배인 데다 박 대통령의 동향 후배라는 권위를 내세워 윤 장군이 자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 사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 1·21사태의 재구성 Ⅱ 도주로 차단작전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방첩부대 특공대장인 나는 인왕산 기슭에서 자수한 김신조를 데리고 우리에게 협조하도록 회유, 설득해 특공대원 25명을 지휘하여 적의 도주로 차단작전을 신속히 전개했다. 오전 5시 컴컴한 새벽, 우리 특공부대원 25명은 나의 지휘하에 작전에 돌입했다. 오전 6시, 경복고 정문을 통과하여 인왕산으로 향했다. 학교 추녀 밑에 경찰 20여 명이 추위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나는 경복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토가레프 북한 권총 1정을 노획하여 불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