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이다.

- 다산 정약용 -

8사단 보안부대장

산짐승은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지 않는다. 먹이를 받아먹으면 산짐승이 아니라 가축이 된다. 나는 산짐승이었다. 어디에도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 내가 추구한 삶은 오직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애국과 애족이다.

당면한 애국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요, 군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애족이다. 다행히 보안(방첩)부대이지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했다는 점에 있어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평화는 목표이며 전쟁은 수단이다. 올바른 정치 지도자는 국군이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갖도록 북돋아 주는 것이다. 군에서 전방근무 중령 이상에게 관사(공관)가 주어진다. 가족과는 별거하면서 개인 시간을 갖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나는 공병전술, 지휘통솔 등 자료를 정리하고 매일 2시간 이상 공부하였다.

1969년 4월 17일, 소령 진급 6개월 17일 만에 중령 보직인 8사단 보안부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사고로 결원된 8사단에 김재규 사령관의 지명 보직이었다.

8사단 보안부대가 주둔한 곳은 포천 일동 지역으로 군인은 물론 군내 간첩 침투, 민간인까지 신경 써야 했다. 지역 군부대의 정보를 수집 보고하는 간첩을 검거하는 부대다.

전투부대 근무 당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파견된 보안부대 요원들의 사고방식이 구태의연하다는 것이었다.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부대 장병들의 정신교육이었다. 나는 전투부대를 위해 봉사하는 보안부대가 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보안부대장이라는 단위 부대지만 각 부대 전투지휘관들의 생각을 바꿔보겠다는 각오를 다져갔다. 그 결과 3개월 만에 우리 부대에 대한 사단 지휘관들과 장병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1969년 9월, 16연대의 한 병사가 탄약고에 들어가 총을 들고 2명을 사살하고 난동을 부린다는 보고를 받았다. 성질이 급했던 연대장이 “빨리 빨리 저놈 잡아라”며 대대장에게 지시하는 것을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지휘관은 부대 장병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항상 파악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음을 말하고 연대장 오철 대령과 같이 행동하면서, 공비를 잡던 경험으로 도주로를 차단하고 병사의 심리 상태를 이용, 정신적인 안정을 기다리며 식사 등을 넣어주었다. 보안사령부 대공처에 연락해 인천에 거주하는 병사의 어머니를 3시간만에 모시고와 마이크를 들고 10분간 병사를 설득한 끝에 스스로 총을 놓고 자수, 탄약고를 나오도록 했다.

진종채 사단장이 나를 찾는다 해서 갔다. 그날 저녁, 연대장 일동을 대전옥으로 소집하고 내게도 참석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고는 연대장들을 향해 “새로운 보안부대장이 인민군 잘 잡는다고 소문났더니만 아군도 잘 잡네.”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후, 사단장이나 연대장들은 서울로 외박을 나가게 되면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보고만 받아도 될 사람이지만 부대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대장과 연대장들을 직접 찾아가 문제를 같이 해결하였다.

부사단장 문왕상, 연대장 김영동, 윤대영, 배성순, 오철, 김상은, 장기오, 이덕만 대령, 그리고 수많은 선배 사단참모와 대대장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내며 지휘통솔, 전투력 증강에 대한 토의를 하였다. 선배들로부터 육군대학 교재를 받아 공부도 열심히 했다. 보안부대를 떠나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대대장 준비를 하였다.

백석주, 진종채, 장봉천 등 세 분을 사단장으로 모시면서 세 분 모두 특징 있는 장군으로 나에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나는 사단장을 자주 만나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이 열심히 한다”는 말을 전했다. 내 말에 사단의 사기가 충천했다. 보안부대장 소령 한 사람의 말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

1970년 4월 어느 날, 장봉천 사단장이 내게 말했다.

“여보 보안부대장, 내가 사단장할 때 대대장 때워요.”

정말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하였다.

“저는 대대장 자격 없습니다. 사단장님은 육군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중령이어야만 대대장 시키는 분이 아니십니까. 제가 하면 안 되지요. 저는 육군대학도 졸업하지 않았고 아직 소령입니다. 중령이 되려면 1년은 더 있어야 됩니다.”

장 사단장은 서울로 외출을 나가 김재규 보안사령관을 찾아갔다. 이종찬 장군이 육군대학 총장 시절 김재규 장군이 부총장, 장봉천 소령이 비서실장이었기에 김재규 사령관과 가까운 사이로 사단장으로 추천했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우리 사단 보안부대장, 대대장시키려 하는데 승인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에 김 사령관은 “안 돼요, 인사군기 확립을 위하여 보안사령부 인사과장 시킬 겁니다. 소령에서 중령 특진시키려고 육군본부에 추천해놨어요.”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김재규 사령관의 말처럼 1년 후 중령 진급 예정자였던 소령인 나를 70년 10월 보안사령부 중요 직책인 인사과장으로 내정했다. 보안사령부로선 예상 밖 인사발령이었다.

 

책 사건

1970년 보안사령부에서는 전국의 각 부대를 상대로 책과 가방을 판매한 일이 있었다. 전 장병 특히 하사관 이상 간부에게는 의무적으로 구매하도록 각 보안부대장들에게 지시 하달되었다.

정신전력에 관한 책이었는데 나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정신전력은 각 부대 지휘관과 정훈참모 소관이었다. 정신전력에 관한 책이었으니 각 지휘관들은 명분이 좋다고 여겼다. 판매가의 절반은 송금하고 나머지 반은 각 보안부대장이 알아서 쓰라고 했다.

나는 사단에 파견된 보안 반장들에게 “강매하지 말고 이권에 개입하지 마라. 사단 정훈참모 소관이지 방첩부대 소관이 아니다. 정상적인 업무 이외는 관여치 마라.”고 지시하였다. 우리 보안부대가 책장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1군사령부 보안대에서 부대장 L 대령이 8사단을 방문한다는 전문이 내려왔다. L 대령이 L-19를 타고 경기도 포천군 이동에 위치한 8사단 비행장에 도착했다. 8사단만 책을 구매하지 않고 있어 사단장 면담차 방문한 것이다. 그는 곧바로 사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L 대령은 사단장과 30분간 대담 후, 11시 30분 원주로 돌아갔다. 나는 식사도 않고 떠나는 L 대령의 뒷모습을 보며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J 장군이나 L 대령을 지금도 나는 이해 못 하고 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정신교육 필독서라는 명목으로 보안사령부에서 구매를 지시한 내용이 어느 기관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던 것이다.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박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아무리 정신교육 책자라 하더라도 동기가 불순해요. 이 사실을 사령관은 알고 있었소?”

“네,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장과 관계 참모들이 군 정신교육 차원의 책자라고 하여 승인했습니다.”

“그러면 군 정훈 계통을 통해 예산으로 구입해야지 장병들의 주머니를 털어서야 되겠소. 사령관, 앞으로 잘하세요.”

대통령으로부터의 질타가 있었다.

“보안사령부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옛날 특무대나 방첩대처럼 장병들을 괴롭히는 일을 해선 안 되지요.”

“명심하겠습니다.”

보안사령부와 업자와의 합작 일명 책가방 사건이다.

사령관은 보안처장 K 대령에게 지시하여 전국보안부대 감사를 하였다. 8사단을 제외하고 모두 문제가 되었다. 사령관은 나에게 면담지시를 내렸다. 김 사령관은 대통령과의 면담내용을 들려주며 내가 책 사건과 무관한 것을 보고받고 말했다.

“인사군기가 문란한데 인사과장을 해야겠어, 그리 알고 있어. 그간 고생 많이 했다.”

“아닙니다. 저는 대대장 나가겠습니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1년 하고 대대장 해도 되잖아.”

사령관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은 제가 사양하겠습니다. 받지 않겠습니다.”

“얼마 안 돼. 받아, 이것은 상급자 격려금이야.”

“감사합니다. 병사들 내무반에 텔레비전과 탁구대를 사령관님이 사주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내 말에 김 보안사령관은 또 하나의 봉투를 꺼내들었다.

“그러면 이것은 가족에게 전해주게, 명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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