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 문선정 시인

시의 사계

/ 김나영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링

나는 링 안팎에서 비틀거리는 외롭고 쓸쓸한 복서

땀과 눈물과 비난과 박수와 함성과 백색공포가 들끓는

네 개의 모서리 안으로 헛꽃이 피고 지고 일그러진 나의 태양이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끝도 시작도 없는 카운트다운이 이명처럼 울리는 곳

죽어가기 직전까지 피 묻은 펀치를 날려 보렴 그러면 꽃이라도 흑흑 던져 주지

짓무른 눈빛 수천만 번의 스윙을 받아먹고 사는 곳

멀리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관棺

김나영시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21/천년의시작)시집 중에서

 

문선정 시인
문선정 시인

 [시 평설 - 문선정] 시집 첫 순서에 설치해 놓은 링 안에 웅크리고 있다. 복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화자의 생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땀과 눈물과 비난으로 섞어놓은 백색공포의 먹잇감으로 던져진 우리는 간혹 닥쳐오는 어려움과 슬픔 속에서 맷집을 키운다. 젊고 혈기 왕성하게 쓸쓸하고 외로워지는 훈련도 필요하겠다. 
세상에 흠씬 두들겨 맞은 짓무른 눈에서 발아된 꽃이 천방지방 피고 지고 또 피고 후드득 지면 박수와 함성을 받아먹고 두 손 번쩍 들어 올리는 호기도 부릴 줄 알아야겠다. 싸움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하지만 복서에겐 링 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싸움이 목적이지 않겠는가.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요리조리 피하는 것도 다음 공격을 위한 작전일 것이다. 

복서여, 상대가 공격하면 사력을 다해 공격하라. 필사적으로 훈련한 장딴지의 힘과 주먹으로 버틸 수 있으면 버티고 이길 수 있으면 이겨라. 
상대가 사랑을 고백하면 달콤한 장미와 백합을 선물하라. 동물성이기도 하고 식물성이기도 한 게임에 길들여진 인생이라는 링.

누군가에게는 이익으로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남을 심란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납작한 몸으로 바닥에 드러누워 쉬어가는 사람이 되어라. 더 이상 늙을 수 없어 목숨이 헐리는 날까지 유유히 링 안팎을 누비고 다녀라. 
만만하지 않지만 애지중지 여기는 링. 멀리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관棺.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