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6월 28일은 ‘철도의 날’입니다. 1905년 1월 1일에 개통된 441.7km의 경부철도- 그 어중간(충북 영동군 영동읍 가리 588번지)에서 출생한 저로서는 국가기념일 이상으로 각별합니다. 백두대간의 227m 추풍령역을 오르내리는 기차의 굉음은 자장가이자 기상나팔이었으니 말입니다. 조부께서「천자문」을 가르치시는 엄한 시간에도 칙칙폭폭 소리가 나면 들창으로 한참 내다보았습니다. 장맛비와 폭설, 어둠을 헤치며 달리는 객차와 화차들...
역장이셨던 백부님 덕에 무임승차권 소위 ‘가족 패스권’이 발급되었습니다. 해서 방학이면 명함보다 작은 그것을 쥔 채 사촌들과 숱하게 나다녔습니다. 그때마다 지척의 미륵역(서울기점 218km: 철도산업정보센터 참조)에서 승하차했는데 지금은 폐역이지만 1970년대 초까지 서울과 부산으로 활짝 열린 문간이었습니다. “오늘 월나라로 떠나 어제 도착했다!” 그렇습니다. 장자의 절친 혜시의 정언 그대로 저의 어제와 오늘, 내일 그 생애사의 의미가 깊은 역인 것입니다.

이번 ‘글자그림 이야기’는 자작시 한 편과 철도와 관련된 웅숭깊은 글귀 몇 개를 소개할까 합니다. 기차여행 경험들 많으실 터라 중언부언하는 듯싶어서요. 우선 철도鐵道 의 ‘길 道’와 ‘하나 一’의 연관성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원전 중국 상나라 전설의 태호太皞 복희씨伏羲氏가 먼저 ‘一’을 그리고, 그것을 나누면서 8괘(하늘, 못, 불, 우레, 바람, 물, 산, 땅)를 만들었는데 태극기의 4괘가 바로 일부입니다. 훗날 주대의 문왕이 이 8개의 상象을 중첩해 64괘를 그렸는데『주역』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와 공자를 위시한 고대 현인들은 그 ‘일, 하나 一’을 왜 ‘도道’라고 명명했을까요? ‘길 道’의 갑골문이 ‘쉬엄쉬엄 갈 착辶’과 사람의 ‘머리 수首’가 결합한 형상인데 길을 가면서 곰곰이 그것을 궁리하라는 뜻으로 주석하지만 불분명합니다. 여하튼 천하지동정부자일자야天下之動貞夫一者也: 복희씨의 ‘一’은 만물이 갖는 공통된 성질이고, 분화한 ‘- -’가 세상의 길에서 벌어지는 다양성을 함의하는데 양의兩儀라고 불렀습니다.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그 음과 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천지 운행의 법도가 된 것입니다. 어렵게 느껴지면 서양의 주류 종교의 본령인 ‘삼위일체’와 견주시면 명확해지실 겁니다. 하나의 여럿, 여럿의 하나 말입니다.

저는 일찍이 기찻길이 양의와 같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성을 갖춘 ‘양성구유’적 존재인데 또한 두 레일의 열차가 지금, 여기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해 낮과 밤을, 24절기의 계절을 만드는데 기차 역시 두 평행선이 호응해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려보신 적이 많으실 터. 아마도 열차가 달려가 굽히면서 사라지고, 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현상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수평선의 배도 마찬가지인데 무엇보다 보는 주체 곧 자신이 중심일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물심합일- 기차와 한 몸이 되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느끼겠지요. 이렇듯 나와 너, 우리는 많은 만남과 이별을 통해 미래부처 ‘미륵’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미륵역은 불교의 미륵불彌勒佛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데 이도 부연이 필요하겠습니다. 미륵은 현재는 보살로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는데 석가모니는 그 목숨이 4천세, 인간 나이로 56억 7천만년이 되었을 때 인간계로 내려와 자신을 대신해 중생을 구제한다고 예언했습니다.
미륵불을 자처한 후백제의 궁예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겠지요.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미륵신앙을 반영한 미륵역이라면 억지춘향일까요? 하늘과 땅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중간자적 존재인 사람이 누군가,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토당토하지 않을 성싶습니다. 아무튼 휴가철에 기차 여행하실 때 두루 생각해 보실 주제라 첨언했습니다. 토끼 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1’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변화시키는 것이다.”
수평에 수직 얹는 평행선 철길 희망 절망 사이 전망의 열망 갈망 뤼미에르
형제의 증기열차 설국 제5도살장 곰스크로 가는 기차 지하철 1호선 철도원 3대
원뿔대 바퀴는 말징이 확장된 근현대의 상징 기차 멈추지 않아서 아니면 내리고
오르는 이 없어 폐쇄된 미륵역 경부철도가 441,7km의 어중간 미륵彌勒역
집 나간 시혼(詩魂) 찾는 일대 철마 한숨 돌리지 않았다면 개마고원 인제 원통보다 더 오지 민주지산 충청도 쪽의 숨터 영동 미륵 황간 추풍령 직지사 지수화풍
4대 허공의 대괴 땅 바다 생것 날것이 물산의 전부인 시대 고구려 몽골 이집트
그리스 벽화 십방 이은 문자 혜초 최치원 김정희 현자들 걷고 넘던 들길 산길
뱃길에 더한 그 길 만든 천주쟁이 동학군 9멍 4지 13의 몸과 맘이 내는 손과
발 눈 길 낸 꿈길 새길 역사에 총의 증오 맛과 멋의 향연 교파 정파 학파 시간
공간에 인간을 더한 삼간 웃음 꽃밭에서 태어나 울음바다로 떠나는 한뉘 학력 재력 체력을 쟁취하는 일과 밥 꿈의 사람들 도시화 산업화 민주화 지나 들레고 들꾀는 디지털 시대 급박 대박 천박이 난무하는 위험 피로 사회 이제 던적과 살천스런 풍속 우리 것 잊고 무시한 혼돈
있다 없어지는 사람과 열차 무한의 유한 모두 죄다 이 2 二 two...
굽히며 가고 펴면서 오는 새날은 어제의 내일 내일의 어제인 오늘 뿐 봄비에
잎보다 꽃 먼저 장맛비에 곡식 실하고 이슬 서리 분주하던 눈과 손 발길 멈추고
눈 마중한다 자꾸 바라고 바라 그리로 부는 바람 그리워 자꾸 그리다 보면 그려
지는 얼굴 죽은 사람이 돌아가신 분이라면 산 자는 길을 가는 이 그 저 사이
저마다 살아내는 그승 어둠 쫓는 기차 탄 이들 차창에 비친 나 너 우리 죄다 미륵
인간 부처의 마지막 남긴 말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인간은 사람과 자연
에게서만 배우는 법 바로 탐 진 치 무명 쫓아내는 불빛은 오직 양자일 뿐 살과
피 돌아보는 살필 대상 가장 가까운 직선은 가장 먼 곡선 사람이나 기차는 식물
아닌 멈추고 나가는 힘 부리는 동물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사이에 기차가
기차게 달린다 미륵역은 해 뜨고 달 기우는 매일 기다린다 유한의 사람들 무한 가는 기차 태우려고 기차 기적과 바람결 흩날리는 미륵역 기차표에 새겨진 문구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1’
- 김래호 詩「미륵彌勒역에서」전문(202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 번득이는 기차 창들이 유령처럼 쏜살같이 지나가는데, 미소를 띠고 차창에 서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 안톤 슈낙 산문「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철도가 모든 것에 생기를 부여했다. 하늘은 흔들리는 무한이 되고, 자연은 움직이는 미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풀려나 땅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의 뒤로 늙은 아하수에로(방랑하는 유대안들)를 길 위에 버려두고 계속 길을 가고 있다. - 벵자맹 가스티노 산문「철도생활, 파리 1861년」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리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편소설『설국』첫 문단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초원을 뚫고 울리다가 멀리 사라질 때면, 갑자기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솟구쳐 나는 쓸쓸한 심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것처럼 잠시 서 있곤 한다. - 프리츠 오르트만 단편소설「곰스크로 가는 기차」
오늘은 스무 나흘 지금은 영시 반쯤 추풍령까지 왔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차중입니다. ... 소박한 자연에 안기어 새로 어린 춘색에, 나는 겨울을 벗어난 사슴과 같이 즐겁고 안온합니다. / 무엇, 글을 끄적거려 쓰는 동안, 차는 황간에서 벌써 영동에 왔습니다. 차 안에는 불과 8, 9인이 있을 뿐. 거의 빈 것 같이 한료합니다. 바깥 풍경도 매우 화창한 것이 차를 내려서 걸어가고 싶습니다. / 소향 형 / 그간 어떠하십니까? 무엇을 사고하며 지내십니까? / 흰구름 둥둥 구름은 가고...... 이제 다시 동생은 잠자는 시혼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 박두진 편지글「영동을 지나며」(1948년 중등 국어교과서)
1959년 충북 영동 출생/ 서대전고.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대전MBC·TJB대전방송·STB상생방송 TV프로듀서(1987-2014)/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1980)/ 제28회 동춘당전국휘호대회. 제18회 면암서화공모대전 캘리그라피부문 입선(2025) 제29·30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특선(2023-2024): 제28회 입선(2022)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부문 입선(2022)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 입선(2020)/ 산문집『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 출간/ 현재: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 영동작가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