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악樂이란 마음속에 맺혀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그때 잘 우는 것을 골라 그것을 빌려 운다. 쇠, 돌, 실, 대나무, 박, 흙, 가죽, 나무 이 여덟 가지는 사물 중에 잘 우는 것이다. 자연의 계절 변화도 또한 그러하여 잘 우는 것을 택하여 그것을 빌려 운다. 새는 봄을 울고, 천둥은 여름을 울며, 벌레는 가을을, 바람은 겨울을 운다. 사계절이 가고 오는 것은 분명 그 평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도 역시 그러하다. 사람의 소리 중에 정교한 것이 말이며, 말 중에서도 문장은 더더욱 정교한 것이다. - 당唐나라 문인 한유(768-824).「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부분  

울고불고 환호작약해도 시간이, 세월이 흘러 입동이 코앞이다. 머지않아 눈발이 대지에 장할 터. 봄비, 장맛비, 이슬, 서리... 물의 치환이 한 해인데 문득 회두리에 이른 것이다. 지용의 시구대로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는’ 겨울- 이제 삼라만상은 삭풍에 회한을 날리며 속울음을 지으리라. 북방 설원의 자작나무들처럼 절대 고독의 새하얀 계절. 그런 철이면 만물의 심연, 그 제소리의 선율이 더욱 처연해진다. 

관현악 음률 속에 술잔을 전하니 / 기린 모양 향로에서 용뇌향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 옥피리 비껴들고 한 곡조를 부르니 / 하늘 위 푸른 구름 씻은 듯하구나. / 소리는 파도에 부딪치고 / 곡조는 청풍명월에 나부끼네. / 경치는 한가한데 인생은 늙어가니 / 살같이 빠른 세월이 서글프구나. / 풍류는 꿈결 같아 / 기쁨이 다하니 번뇌가 일어나네. 

서산에 오색 안개 흩어지자마자 / 동산엔 얼음쟁반 같은 달이 맑디맑구나. / 술잔 들어 푸른 하늘 맑은 달에게 묻노니 / 추한 모습 아름다운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 / 금잔에 술은 가득한데 / 사람이 취해 옥산 무너지듯 쓰러지네. / 누가 그를 밀어 넘어뜨렸나. / 아름다운 손님을 위하여 / 십 년의 근심과 울적함을 털어 버리고 / 푸른 하늘로 유쾌하게 올라보세. – 김시습.『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수룡음水龍吟」

“박연의 용왕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고려 조정에 문명이 알려진 한생- 해거름에 송도 천마산의 용추로부터 낭관이 찾아왔다. 그날 밤부터 새벽 5경까지 벌어진 일을 기록한 소설이 “용궁 잔치에 초대받다”이다. 사실 용왕은 혼기를 맞은 딸을 위해 가회각이라는 누각을 지었는데 상량문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할 셈이었다. 한생은 ‘구름과 연기가 서로 얽힌’ 글을 써내려 갔고, 흡족한 용왕이 윤필연을 베푼 것이다. 그 연회에서 실연된「벽담곡」과「회풍곡」을 비롯한 음악과 무용이 실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하튼 시적 가사와 온갖 귀신들의 춤사위 묘사는 가히 조선 최고의 문장가 김시습다운 천의무봉의 비단결이다. 

짜장, 김시습(1435-1493)이 누구인가?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깨친 신동 매월당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통분하여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경서를 불태워 버리고,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에 올랐다. 경주 금오산과 부여 무량사 그 발자취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 탄생했다. 귀신과 혼인하고, 염라대왕과 정치 토론을 하고, 선녀와 용왕을 만나 시담을 나누는 등속의 비현실적 체험은 곧 벽산청운 자신의 ‘울음’ 자체였다. 

청한자가 59세를 일기로 삼도천을 건너자 여러 벼슬이 추증되었다. 천상과 하토, 수계를 넘나든 그에게 관직 따위는 오히려 굴레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후대의 문인 심의(1475-?)가『기몽』이라는 소설에서 김시습을 환생시켰다. 선계에 자리한 시의 왕국- 심의가 당도한 그 나라의 왕은 최치원이었고, 수상이 을지문덕, 이제현과 이규보가 좌상과 우상이었다. 

이 왕국에서 지위의 고하는 오직 시를 쓰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뿐이었는데 현실에서 불우했던 심의는 승승장구했다. 어느 날 문천군수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가 토벌군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그런데 장수는 백만대군 대신 피리 한 자루와 머리가 흰 하인 몇을 대동하고 수괴와 맞섰다. 소영비술嘯詠祕術과 첨두노尖頭奴- 천지조화의 피리와 붓으로 제압하고 보니 김시습이었다. 

왕이 배를 타고 동해에 뜬 그 작은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고 와서 바치는지라. 왕이 영접하여 같이 앉고 물어 가로되 이 거북 머리 닮은 산과 한 줄기 대나무가 혹 나누어지기도 하고, 혹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용이 말하되 비유컨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대란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 성왕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 대를 취하여 적苖을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다. - 일연.『삼국유사』권제2「만파식적萬波息笛」부분 

681년 통일신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한 신문왕- 대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지정했다. 훗날 그 대적을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역병이 사라지고, 가뭄에 단비가 내렸다. 또한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잦아들고, 바다의 폭풍우마저 잠잠하게 된 것이다. 심의가 지닌 소영비슬의 그 피리가 의당 만파식적이었으리라.          

앞에서 적시한 대로 김시습의 ‘용궁’ 연회에는 이승과 저승의 온갖 물상이 등장한다. 나무와 돌의 도깨비들과 사람의 귀신들이 저마다의 장기를 보여주었는데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춤도 추고, 피리도 불고, 손뼉도 치고, 뜀도 뛰었다. 이렇듯 각자 노는 모양은 달랐지만 연주와 노래는 한결같았다. “‘채련곡’을 노래하며 / 너울너울 춤도 추고 / 둥둥둥 북을 치니 / 거문고를 뜯어 화답하네 / 노 한 자루로 배를 저으며 / 고래처럼 강물을 마시네 / 두루 예절을 갖추어 / 즐거우면서도 허물이 없도다”  

『삼국사기』에는 이 거문고의 전래와 작곡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처음에 진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칠현금을 보내왔으나 악기인 줄 몰랐고, 성음이나 연주법을 몰랐으나 왕산악이 고쳐 다시 만들고, 100여 곡을 지어서 연주했는데 현학玄鶴이 날라와 춤을 추었으므로 현악금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신라에 전수되 속명득과 귀금이 익혀 작곡했고, 또한 안장과 청장을 거쳐 그 아들 대에 이르러 대중화되었으며, “거문고로써 자업하는 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가야금은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떠 만든 것이다.『풍속통』에 “쟁은 진나라의 악이다.” 하였고,『석명』에 “쟁은 줄이 높아서 생생하다. 병과 양 2주의 쟁은 슬瑟과 같다.” 하였다. 부현은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뜨고, 아래가 고른 것은 땅을 본뜨고, 가운데가 빈 것은 6합에 맞추고, 줄 기둥은 12월에 비하였으니, 이것은 어질고 지혜로운 악기다.” 라고 말했다. 또한 완우는 “쟁의 길이 6자는 율수에 응하고, 12현은 사시를 본뜨고, 기둥의 높이 3치는 천지인의 3재를 본떴다.”고 했다. 가야금은 비록 쟁과 더불어 제도는 조금 다르나 대개는 비슷하다. - 김부식.『삼국사기三國史記』지志 제1 악樂

국악기 가야금은 그 제작 의도와 연대가 분명한 악기다.『삼국사기』에 “『신라 고기』에 이르기를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는데 나라마다 성음이 다르니 성열현 사람 우륵于勒에게 12곡을 만들라 명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우륵이 신라에 망명하여 전수하는 과정, 신라 출신의 제자들이 만든 새로운 5곡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는 광경이 이어진다.

“즐거우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애련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다. 너희는 왕 앞에서 연주하라.” 진흥왕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했지만 신하들은 망국의 가야 음악은 취할 것이 못 된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왕은 “가야 왕이 음란하여 자멸한 것이지 악이 무슨 죄인가. 대개 성인이 악을 제정함에 있어 인정을 따라 조절한 것이지 나라의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음조로 인한 것이 아니다.” 라며 즉각 시행하여 대악으로 삼게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지志 제1 악樂) 

나라의 시속이 세태가 흉흉하고 어지러웠던 지난 여름과 가을- 우리 사는 이 땅에 정녕 김시습의 꿈길 같은 연회는 멀고 먼 아득한 일인가? 어느 누가 ‘민파식적’의 그 피리 불어 갈라진 세파를 봉합할 것인가? 해현경장解弦更張- 저마다 마음속의 가야금과 거문고 꺼내어 줄을 바꾸어 매야 할 때다. 1981년「사평역에서」- 해마다 겨울의 초입에서 톺아보는 곽재구의 시를 다시 낮고, 느리게 읊조려 본다. 

자정 넘으면 /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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