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글짓기를 이렇게 규정했다. “만약 다시 중국에 성인이 나와 여러 나라의 풍속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선에서는 이덕무의 시문을 깊이 헤아려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이덕무는 조선의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표현했고, 조선 사람의 성정을 글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덕무의 시문詩文은 마땅히 ‘조선의 국풍’이라고 해야 한다!”

말의 입술은 누에의 입술과 유사하다. 호도는 장차 부화할 벌과 나비의 애벌레와 닮았다. 쥐의 꼬리는 뱀과 유사하다. 이는 마치 비파와 같다. 서캐는 흡사 황증에 걸려 누렇게 된 보리와 밀과 비슷하다. 푸른색 줄무늬의 오이 껍질은 마치 황록색 줄무늬가 있는 개구리 등과 닮았다. 박쥐의 날개는 소의 볼과 동일하다. - 이덕무『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서로 닮은 사물들」부분

직접 관찰하고 탐구해 얻은 지식은 서적과 문헌을 통한 간접적인 그것에 앞선다. 이덕무의 실학적 박물학은 그 순수성과 섬세함 속에 조선의 생생한 ‘진경’을 고스란히 드러내 전해준다. 그의 이러한 시문은 중국까지 잘 알려졌었다. 비록 서얼 출신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학문을 갈고닦아 당대 최고의 지성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면서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

정조대왕은 1776년 즉위 후 이덕무를 규장각 사검서로 특별 임명했는데 1792년 개성적인 문체를 금지하는 문체반정에 휘말렸다. 하지만 사후에 국가적 차원에서 유고집이 간행될 만큼 총애했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실장은 영.정조대의 문화를 조선의 고유색을 한껏 드러낸 ‘진경眞景시대’로 정의했다. 겸재 정선이 그 진경 산수화의 대가 반열이라면 이덕무는 바로 진경 시문의 대문호였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상강霜降」(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상강霜降」(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봄비는 윤택해 풀의 싹이 돋는다 / 가을 서리는 엄숙해 나무 두드리는 소리에 낙엽이 진다 – 이덕무『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봄비春雨와 가을 서리秋霜」전문

10월 24일, 오늘이 24절기의 18번째인 상강霜降이다. 한 철에 6개씩 보름마다 갈마드는 스물네 번의 절기- 그러니까 가을의 회두리 절후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다. 이제 보름 후면 11월 8일, 겨울의 문턱 입동이다. 이덕무는 봄비와 서리 그 물기운의 순환을 익히 파악하고 우수雨水의 풀과 상강霜降의 낙엽을 대비시켰다.

철학의 아버지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BC 624-546)는 “만물의 아르케는 물이다!”고 정언했다. 아르케arche는 근원, 원리라는 뜻으로 그 탐구는 사물의 근본, 시원을 찾고 캐묻는 행위이다. 한자 ‘원原’은 기슭 엄厂에서 물水, 천泉이 흘러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원은 시초, 시작, 기원을 의미하는데 ‘물’이 만물의 진원이라는 주창이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상강霜降」(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상강霜降」(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조선의 이덕무는 북학파 실학자답게 ‘서리’를 정치하고 예리하게 관찰해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서리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 서리 또한 각양각색인데 그는 관물觀物의 철학적 전환, 곧 사물을 관찰할 때 본질을 파악하고 포착하는 데 집중한 것이다.  

내가 예전에 서리 조각을 보니 거북등무늬와 같았다. 최근에 다시 보니 어떤 것은 비취의 털 같고 또 어떤 것은 아래에 작은 줄기가 하나 있어 아주 짧고 가늘다. 위에는 마치 좁쌀처럼 보이는 것이 서로 모여 있는데 반드시 여섯 개가 모두 뾰쪽하게 곧추서 있었다. 대개 기와에 내려앉고 나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아주 작고 가늘다. 마른 풀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자못 생김새가 분명하고 밖으로 노출된 해진 솜이나 베에 붙은 것은 셀 수가 있을 만큼 역력해 그 기이하고 공교로운 모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 이덕무『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서리 조각霜片」부분

“반드시 여섯 개가 뾰쪽하게....” 봄비, 장맛비, 이슬, 서리, 눈... 기실 물기운의 순환이 1년이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비, 발육과 성장을 돕는 여름의 장마, 찬 공기와 소슬한 바람에 맺히는 가을의 이슬과 서리, 새하얀 눈발로 세상을 뒤덮는 겨울의 눈이 아니던가? 그런 변화 속의 ‘서리’를 적확하게 살피고, 적절한 비유로 표현한 이덕무라면 우주변화의 원리나 만물의 아르케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을 터.  

이제 서리의 상강 지나면 눈의 겨울이 시작된다. 짜장 오면 가고, 가면 오는 시간, 세월이 무정하기만 하다. 하지만 가기만 하고 역시 오기만 한다면 세상은 분명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런 날들이 쌓여 한 해가 이어지고, 또한 매조지 된다. 깊어 가는 이 가을날에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톺아 살피고, 주위의 사람들과 자연의 순환을 깊은 눈으로 응시하는 여유와 감상을 즐겼으면 좋겠다. 늘 오는 ‘오늘’과 늘 하나인 ‘하늘’이 사람 한살이의 일습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으리라! 제철 지금, 여기의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서대전고,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전MBC와 TJB대전방송, STB상생방송에서 프로듀서(1987-2014)를 역임했다.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부문 입선(2020) /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 / 제29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특선(2023): 제28회 같은 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했다. 산문집 『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 『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를 펴냈고, 현재 충북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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