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고 화해하는 크리스마스 되길 소망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음악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졌다. 
사마천의 '사기' 중 '항우본기'에 나오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서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데는 영국의 록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히어로즈'의 힘이 컸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위 셸 오버컴'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은 197,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추동하는 원동력과 같았다. 

예로부터 음악은 이렇게 시대를 바꾸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위대한 힘을 발휘해 왔다. 수많은 노래들 중 가장 오래도록,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아온 노래는 캐럴일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울려 퍼지는 노래,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누구나 한두 곡쯤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캐럴이다. 

연구된 게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캐럴이 지구촌 인류 사회의 여러 방면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날 것이라 짐작된다. 캐럴 중에 대표적인 것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노래는 아주 우연스럽고도 극적인 동기에 의해  탄생했다. 

1818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앞두고 갑자기 파이프 오르간이 고장났다. 그 동안 이날 미사를 위해 준비해 온 성가를 반주 없이 불러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음악 교사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프란츠 그뤼버가 실망하는 모습을 본 보좌신부 요제프 모어가 오르간 대신 기타 반주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뤼버는 가사만 있다면 그도 좋겠다고 했다. 모어가 써서 가지고 있던 가사를 건네자 그뤼버가 하루 만에 곡을 붙여 완성했다. 

즉시 연습에 들어가 성탄 전야의 미사에서 공개됐다. 모어가 기타 반주를 맡아 그루버와 함께 노래했다. 나중에는 합창단도 같이 노래했다. 가사도 곡도 모두 서정성 넘치는 아름다운 노래에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북한 외에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금지곡이지만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캐럴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2011년 이 노래를  오스트리아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기적 같은 일화 한 가지를 갖고 있다.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 프랑스 북부 독일군 점령지역 안에 영국, 프랑스, 독일 군인들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다. 언제 적의 공격이 개시될지 모르는 긴박감이 감도는 가운데 어디선가 은은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숨죽여 듣고 있던 병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새,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참호 밖으로 나와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캐럴을 부르고 영국군이 '영원한 고향을 꿈꾸네'를 불러 화답하기도 했다. 마침내 세 나라 지휘관들이 모여 휴전을 약속하고 10만여 명에 달하는 양국군들이 함께 음식과 샴페인을 나누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크리스마스 휴전'이라 부르며 감동과 희망을 공유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군인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널리 전하고 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봤습니다. 살인과 죽음 속에도 인간다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가 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이보다 더 극적으로 구현해 낸 경우가 있을까. 6.25전쟁 중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감동스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있었다. 강원도 원주에서의 일이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 이비인후과 의사 문창모의 병원에 군인 한 사람이 찾아와 급하게 왕진을 요청했다. 

서둘러 왕진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서자 군인은 캐나다 군부대로 안내했다. '고급장교가 아픈가보다' 생각했으나 들어가 보니 남루한 차림의 한국인 거지 소년 한 명이 있었다. 

얘기인즉,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는데 밖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나가서 데리고 들어와 몸을 녹여 주고 음식을 먹게 해 주었으나 계속 울음을 그치지 않아 어디가 아픈가 하여 의사를 부르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문창모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아이를 데려와 입원을 시켰다. 아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장난감과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문병 오는 캐나다 병사들로 인해 항상 시끌벅적했다. 

며칠 후엔 사단장까지 왔다. 그만 퇴원시키자고 했더니 머뭇거렸다. 입원비를 묻기에 괜찮다고 했으나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섰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내가 입양하면 안 되겠습니까?'그 뒤 20년이 지난 어느 날 멀쑥한 청년 한 사람이 문창모를 찾아왔다. 

바로 20년 전 캐나다군 사단장 집에 입양된 아이였다. 두 사람은 감격에 겨워 얼싸안고 한동안 울었다. 그는 사단장 집에 입양되어 열심히 공부해 박사 학위를 얻어 캐나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창모 자서전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1996)에 나오는 얘기다.   

12월은 성탄의 달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에 캐럴 소리가 넘쳐나고 트리 장식이 휘황했다.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카드를 교환하고, 소외된 이웃을 찾는 온정의 선물들도 바빴다. 12월은 그저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성탄의 달이 성탄의 달 같지 않게 되고 말았다. 
성탄의 달이라서 풍성하던 것들이 어느새 모두 사라지거나 시늉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서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것들은 본래 형식일 뿐이고 치례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니 말이다. 눈부신 형식과 뻐근한 치례 아니라도 성탄의 참다운 의미를 새기고 구현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더 가치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

전영택은 일찍이 소설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경'(1960)에서 본래의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크리스마스 세태를 준열히 꾸짖은 바 있다.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면서도 추위에 떠는 걸인 소년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인물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제일의적 의미인 이웃 사랑의 도리를 저버린 채 한갓 먹고 마시며 노는 유희의 일환으로 전락한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속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 시기에 벌써 뿌리가 깊었다. 성탄은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의 구현이었다. 

이를 잘 아는 예수는 제자들에게 형식과 의례에 매몰된 전통 율법을 대신할 새 계명으로 사랑을 요구했다.(요13:34~35). 사랑이 제자 됨의 도리라고도 했다. 이는 사랑만이 인간 구원의 첩경이라는 선언에 다르지 않다. 

이로써 사랑은 복음의 핵심적 가치가 되었다. 복음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복음인 셈이다. 그래서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선언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랑은 화해와 일치, 헌신과 봉사, 겸손과 섬김 등을 하나로 아우르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 가치다. 

언제부턴가 날로 날카로워진 진영간의 긴장과 갈등이 봉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채 끓는 냄비 속 같은 나라 안 사정이 썰렁한 성탄의 달 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양보하고 이해하여 하나가 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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