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사범 급증...온 국민이 나서 근절해야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경험 당시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데 앞 뒤 맥락을 이해하게 된 뒤에야 그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깨닫게 된 사건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시골 집은 북향이었다. 대문이 북쪽으로 나 있는 대신 남쪽에는 반원형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햇빛 좋은 그 울타리 한 옆에 키 작은 골담초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해 봄, 노랗게 핀 골담초 꽃가지 밑에 누군가 아주 이상한 행색을 하고 쭈그려 앉아 마구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서움보다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몇 발자국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듯 싶었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초점 없는 시선이었다. 추위는 벌써 물러난 뒤의 계절인데 왜 그리 심하게 몸을 떨고 있던지, 한눈에 보기에도 부실한 입성 탓만은 아닌 듯했다. 

들어와 어른들에게 큰일이나 난 듯 고해 올렸더니 반응이 사뭇 의외다. 벌써 다 알고 있다는 뜻인지, 대수로울 게 없다는 뜻인지. 벙벙히 서 있는 내게 들으랄 것도 없이 쯧 쯧, 혀를 차시며 하시던 할머니의 한 말씀만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놈의 애편쟁이들……애편은 아편의 내포지방 사투리다. 나는 뒤에 그가 이웃마을 아무개 아버지인데 아편쟁이란 걸 알 수 있었는데,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가족 전체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뒤로 어른들은 내게 아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더러 오금박듯 이르시긴 했지만 실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편이란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의 삶을 단박에 황폐시키고 마는 것이라든가, 우리 사는 사회와 국가의 안위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성인이 된 뒤의 일이다. 

우리나라에 아편이 널리 보급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의 일이다. 일찍이 아편을 국가 재정 수입원으로 관리해 온 일제는 한국에서의 아편 생산과 소비를 조장했다. 

한국인 아닌 일본인 학자가 쓴 책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조선사람들은 우선 원료 아편을 공급하는 생산자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원료 아편의 생산자라는 성격에 더해 모르핀 소비자로 만들어 갔다. 조선사람들을 모르핀 중독자로 많이 만듦으로써 그들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구라하시 마사나오,『아편제국 일본』)

모르핀 전문 제약회사인 '다이쇼제약주식회사'는 지금의 서울 아현동에 공장을 세우고 직접 모르핀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의 아편 중독자가 크게 늘어났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1920년대에 벌써 아편 맞는 '아편굴'이나 모르핀 맞는 '주사옥'이 서울에만 수백 곳에 이를 정도였으며, 중독자 수를 70만 명 이상으로추정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들 '아편쟁이'들이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 소환되어 당시의 참상을 증언해 주고 있다. 최정희의 소설「곡상(穀象)」(1938)도 그 중의 하나다. 장사에 실패한 뒤 3년을 기한하고 만주로 떠난 남편이 5년 만에 거지 행색이 되어 돌아왔다. 
마적에게 붙들려 고생만 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살아온 것만도 다행이라 했다. 
그날 밤, 홀로 시부모 모시고 삯바느질로 연명해 온 눈물겨운 경난을 늘어놓고 있는데 남편은 어느새 코를 골고 있다.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일어나 자세히 보니 입에 거품까지 물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곯아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아내는, 오랜 객고에 허약해진 때문이려니, 생각하니 더욱 애틋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내 잠만 자던 남편이 옷보퉁이를 훔쳐내어 달아나는 것을 보고서야 사태의 전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풍문에 듣던 대로 남편은 아편쟁이였던 것이다. 
아내는 아득한 절망감에 자주 자살 충동을 느꼈으나 홀로 남겨질 어린 아들을 생각하며 견뎌 왔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고단한 일상의 무게가 모성애마저 금이 가게 만들었다. 어쩐지 아들이 꼭 제 아비를 닮은 것만 같아 미운 마음이 들고 매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는 아이대로 마음 둘 곳을 잃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 거리를 서성이다 아버지를 만나 아편굴까지 따라갔다. 아들은 결국 사내 아이의 간을 내 먹고자 하는 문둥이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금단 증상을 이기지 못한 아비가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 몬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물론 아편의 반인륜적 해악성을 고발하고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 들어 이같은 아편 서사가 많아진 것은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아편의 폐해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처럼 뼈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해방 후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오랫동안 '마약 청정국'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련의 마약 관련 소식들을 접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털끝이 일어서는 느낌이 든다. 알고보니 마약 청정국 지위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상실됐단다. 

마약 청정국은 마약사범이 인구 10만 명당 연간 20명 미만인 국가에 해당하는데, 우리나라는 지난 1999년 이후 이 기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기준대로라면 인구 5천만 명에 마약사범 1만 명꼴인 셈인데 2015년부터는 해마다 1만 명 이상이 적발되고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니 긴장해야 할 상황인 게 맞다. 

그나마 이는 정부 통계로 드러난 숫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 음성적 마약사범은 적게는 40만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추산까지 가능하다니 왜 안 그렇겠는가. 

마약과 관련된 수많은 지표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대단히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본인의 의지나 선택과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게 중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최근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마약 사범 단속에 나선 것은 사정이 그만큼 급박해졌다는 반증일 테다. 어설픈 단속으로 자생력만 길러주는 결과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게 어디 정부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태원 참사'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벌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탓인 양 호도하는 좌파 선동꾼들도 있었지만, 나이.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섭게 번지고 있는 마약 사범의 증가로 인한 폐해는 장차 이태원 참사 그 이상의 것일 수도 있다. 

매일 194명이 마약 때문에 숨지는 미국에서 18~49세 미국인의 사망 원인 1위가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 중독이라지 않는가. 

누구나 다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다 가해자도 될 수 있는 마약 문제에 관한 한 국민 모두가 예외 없이 지혜를 모으고 손을 합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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