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정체성, 문화원천의 힘....한글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0월은 한글의 달
10월은 한글의 달이다. 이 달에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이를 기념하여 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 조선어학회가 결성된 것이 1929년 10월의 일이다.
최초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표된 것은 1933년 10월, 조선어표준어사정안이 마련된 것도 1936년 10월의 일이었다. 

모두 한글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들이다. 그렇다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글운동 사상 가장 험난한 고비도 10월에 있었으니 바로 1942년 일제가 조작해 낸 조선어학회사건이 그것이다. 

2019년에 개봉된 엄유나 감독의 영화 '말모이'는 바로 이 조선어학회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조선어학회는 1908년 주시경, 김정진 등이 주도해 만든 국어연구학회가 맨 처음의 모태이며, 해방 뒤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의 전신이기도 하다. 

영화 제목이 된 '말모이'는 말을 모아 놓은 것, 즉 사전(辭典)을 뜻한다. 
주시경 선생이 쓴 말이다. 영화는 1929년 조선어학회가 주도해 시작된 조선말큰사전 편찬 과정에 참여한 한글학자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작중 인물이나 사건 등은 실제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다.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사건은 1942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조선말을 쓰다 걸려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배후에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 선생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 끝에 이극로 . 최현배 . 이희승 등 33명의 회원들을 잡아들여 악형을 가한 사건이다. 

이들이 펴고 있던 조선말큰사전 편찬 작업이 조선 독립을 획책한 내란 음모 활동이라 하여 가장 혹독한 '치안유지법' 중 '내란죄'를 적용한 것이다. 붙들려 간 사람들 중 이윤재. 한징은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하고, 해방 뒤 풀려난 사람들은 고문으로 인해 반 주검 상태가 되어 들것에 실려 나오다시피 했다. 

해방 뒤 이들은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사전 편찬 작업도 재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업을 시작한 지 무려 28년 만인 1957년 조선말큰사전 전6권이 완간되었다. 지금 우리가 필요하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국어사전은 우리 고유의 말과 문자를 지켜내고자 한 선열들의 목숨 건 피와 땀의 결실인 것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민족의 운명
1930년대 들어 일제는 본격적인 해외 침략 전쟁에 나섰다. 1931년에 일으킨 '만주사변'은 전 세계를 향한 일본 식민주의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이듬해 중국 동북3성에 괴뢰정부(만주국)를 세운 일제는 대나무 쪼개듯하는 기세로 중국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해 갔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은 저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가장 만만한 수탈 대상이었다. 한반도 안의 모든 물적, 인적 자원들이 송두리째 저들의 병참 물자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저들의 수탈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직접 몸으로 겪은 생존자들의 증언은 지금도 가까이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저항 없는 효과적 수탈을 위해서는 사상 통제가 불가피했다. 

조선 사람도 본래 일본인과 같은 조상의 후예라는 '일선동조(日鮮同祖)', 그러니 두 나라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內鮮一體)' 등의 황당한 이론을 조작해 내어 우리 고유의 정신을 뭉개고 없애버리려 했다. 
민족의 운명이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형국이었다. 일찍이 이같은 비극적 상황을 날카롭게 통찰한 지식인 중의 한 분이 주시경(周時經.1876~1914)선생이시다.

주시경 선생
선생은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을 때, 결국엔 저들이 우리의 근본까지 무너뜨리려 들 것임을 내다보고 있었다. 12세 어린 나이에 서울에 와 배재학당에서 처음 신학문을 접하고 서재필을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어문 민족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이 문화에 있으며, 그 문화의 핵심이 언어라는 인식, 그 위에 세계의 크고 강한 문명국들은 모두 자기네 고유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깨달음이 이를 추동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가 굳게 믿고 의지했던 생각은 '자기 나라를 보존하며 자기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데 있고,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믿음이 선생의 발길을 재촉하고 숨을 가쁘게 했다. 일제가 머지않아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창제 이후 제대로 다듬지 않아 쓰는 이마다 다르고 읽는 이마다 제각각인 한글을 정리해 통일된 문법 체계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연구하고, 가르치고, 집필하고, 선생은 그야말로  불철주야, 밤낮이 따로 없었다. 손에서 글보따리, 책보따리가 떠날 때 없어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은 뜻하고 계획한 일들을 다 이루지 못한 채 1914년, 38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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