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 발행인 / 뉴스티앤티

영문학자 이양하 교수의 글에서 본 듯하다. 그분이 젊은 시절, ‘믿음의 나라 영국’이란 글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연구에 꼭 필요한 참고 문헌을 찾기 위해 영국으로 날아갔다. 찾는 문헌이 영국 박물관 내 국립도서관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편도 여유롭지 못한 시절, 그것도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너무도 유명한 이 도서관 앞에는 ‘대학교수는 도서관 출입이 제한 없이 허용된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그만큼 일반 시민에게는 도서관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그에게 한국의 대학교수임을 밝힐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찾고 싶은 참고문헌을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날라온 터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도서관 안내 사무원이 자신이 한국 교수라는 신분을 믿어줄까 의심을 품은 채, 자기를 소개하고 출입증 발급을 요청했다.

사무원은 “한국의 교수라는 증명서나 신분증이 있습니까” 물었다. 이 교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사무원은 다시 “증명서는 아니라도 한국의 대학교수라는 무슨 증빙서류라도 가진 것이 없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교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거듭 대답했다.

지금과 같은 초고속 통신 시대가 아니었다. 팩시밀리니, 국제전화, 영상통화가 자유로운 시대는 더더욱이 아니었다. 더구나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낯설었을 시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을 확인해 줄 해외 주재 외교기관마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시절이었다.

계속되는 사무원의 질문과 신분증의 요구에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선생, 요구하는 그런 증빙서류나 신분증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무원은 처음 보는 동양인, 한국의 대학교수에게 정중한 자세로 출입증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자신의 말만 믿고 출입증을 내준 것에 감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 출입증에는 무려 유효기간이 자그마치 5년이라고 기재되어 더욱 놀랐다.

이 교수 6, 70년 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신록예찬’, ‘페이터의 산문’, ‘ 내가 만일 대학생이 된다면’이라는 수필을 쓴 분이다. 고건 전 총리를 소재로 한 ‘경이와 건이’라는 수필과 포켓 영한사전 등을 내고 영문 변역시를 국내에 소개한 학자 중의 학자였다.

그는 훗날 “잘 알려지지도 않은 나라, 그 나라의 교수라는 내 말만 믿고 신분증을 만들어준 그 사무원이 영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제대로 알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를 믿는다는 것, 더구나 말을 믿는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영국은 믿음의 국가”라고 평한 것이 기억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엊그제 여야 5당 원내대표와 청와대에서 만나 협치(協治)를 약속했다. 취임한 지 열흘 만에 여야 정치권과 머리를 맞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당선인으로 확정되자마자 국회와 야당을 방문해 소통 행보를 보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청와대 전병헌 정무수석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무수석에 임명 되자마자 사흘 연속 국회를 찾아 이번 회동을 만들어냈다. 너무도 기대했던 행보들이다.

그래선지 회동은 역대 정부 출범 후 가장 빠르게 성사된 여야 지도부 만남이다. 성격은 상견례였지만, 서로의 생각을 듣고 이해하고 논의했다는 데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사전에 짜인 의제에 관한 조율도 없는 만남이었기에 뜻이 깊다. 여야는 상호 신뢰를 다지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야당 지도부와 만났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과거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 간의 만남 뒤에는 뒤끝이 늘 좋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나눈 얘기가 공개됐을 때는 서로 달랐다. 대변인들이 대화를 받아 적어놓은 글귀를 놓고 해석이 구구했다. 얼어붙은 정국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다른 말싸움만 격화됐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때 그랬다. 여야 영수회담이나, 여야 원내 대표회동 직후에는 살벌한 싸움판으로 변질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야당 지도부와 6차례나 회동했지만, 야당 대표가 천막 농성을 벌이는 일전을 벌이기까지 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야당이 법안에 발목을 잡는다고 공격했고, 야당은 독재를 편다고 응수했다.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 간의 만남은 으레 독설과 반발, 성토와 불만, 그리고 불신만 남겼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문 대통령은 후보 때 내건 내년 6월 개헌하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했다.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의 구성도 동의했다. 협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것이다. 지금처럼 여소야대 정국상황에서는 어떤 대통령도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선진화법이 엄연히 살아있어 국회에서 어느 당도 제멋대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다. 협치가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러니 문 대통령과 야당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선 문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는 약속을 지키고 서로 소통·협의하자는데 여러 번 뜻을 모은 것이다.

거기에는 소통과 상대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여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 먼저다. 그것이 곧 신뢰다. 소통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과 원내 대표들은 그래서 각 당의 공통 대선 공약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런 훈풍에도 불구, 앞 날은 심상치 않다. 청와대와 집권여당은 한목소리라지만 야당은 각론에서는 여권이 생각과는 다르다. 문 대통령의 제1기 내각과 장관급 인사들의 인사청문회를 비롯해, 각종 정책현안마다 여야의 셈법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지명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24, 25일부터 시작된다. 이 후보자에 대한 여러 의혹도 야당 일각에서는 철저히 검증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내정자와 강경화 외교부 장관 내정자,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 등 줄줄이 인사청문회 검증에 맞서야한다.

집권 여당은 여야가 협치에 동의한 만큼 이 총리 후보자의 인사검증은 정책검증이 되어야 한다면서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생각은 녹록지 않다. 정책과 큰 틀에서 여당에 대화와 타협으로 동의하겠지만, 얼렁뚱땅 넘기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다.

여기에다, 대선 패배 후유증과 함께 당내 갈등에 휩싸인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문재인 정부 초기에 인사청문회검증부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한국당은 문 대통령이 병역면탈·부동산투기·탈세·위장전입·논문표절 등 5대 비리 연루자는 공직에서 배제하기로 한 점을 문제 삼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내정자의 경우만 해도 그의 장녀가 위장전입의혹이 있다고 청와대에서 밝히면서까지 문 대통령이 내정한 데 ‘공직 배제 대상’이라며 공세를 펴고 있다. 국민의당이나 바른 정당 역시 문 대통령의 정책 등 협치에는 동의하지만, 인사청문회에서 부실검증을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협치라는 이름으로 좋은게 좋다고 넘기는 것은 협치가 아니다. 원칙도 아니고 상식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아닌 것을 사실 인양 물고 늘어지는 발목잡기 또한 협치가 아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믿고, 거짓은 거짓대로 밝히면 되는 것이다.

협치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타협하면 안된다. 여당도 야당에 적당한 협치를 기대할 것이 없다. 집권여당답게 올바른 정책과 원칙 있는 정책으로 설득하고 타협하여 동의를 구하면 된다. 야당 역시 그릇된 타협과 원칙에서 벗어난 타협은 협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는 믿음과 믿게 함이 있어야 한다. 정치에 대한 믿음, 그 신뢰가 워낙 바닥이다 보니 국민이 나서 싸우지 말라는 것이 그 답이다. 여는 야를, 야는 여를 믿지 못하고 믿게 하지 못하니까 협치라는 말이 그렇게 반갑다는 이유인 것이다. 믿음과 믿게함이 그래서 정치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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