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은 정으로 갚고 은혜는 평생 갚는 것

'은혜'라고 할 때 우선 생각나는 게 '부모님의 은혜'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자식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기억해야 한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했을 거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예전에는 스승의 날에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요즘에는 선생님을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도 드물고, 스승의 날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 그런 노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까. 

최근에 '정주영이 누구예요'라는 책을 출간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정 회장이 1930년대 쌀집 점원으로 일할 때 쌀집 주인 할머니의 장손이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에게 들었던 정주영에 관한 이야기, 저자가 30년 동안 체육기자를 하면서 지켜봤던 체육인 정주영 이야기, 그리고 측근들을 인터뷰하며 캐낸, 보석 같은 일화들이 가득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내가 정주영이라는 사람을 다시 평가하게 된 내용이 있다. 
바로 '은혜를 갚는다'라는 부분이다. 정주영은 1934년부터 37년까지 3년 조금 넘게 쌀집에서 일했을 뿐이다. 

그런데 현대건설을 만들어 승승장구할 때나, 현대그룹 회장이 됐을 때도 '주인아주머니'를 챙겼다. 회사 야유회나 가족 경조사 때 항상 초청했고, 할머니 구순 잔치도 마련해줬다. 
돌아가셨을 때는 직접 조문까지 왔다. 더구나 할머니 사후에도 그 후손들까지 챙겼다. 마치 가족처럼 대했다.

도대체 정 회장은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정 회장은 생전에 쌀집 아주머니를 '내가 어려울 때 먹여주고 재워줬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즉, 자신이 성공한 배경에 쌀집 아주머니의 도움이 컸다는 말이다.

정작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을 잘했으니까 예뻐해 준 거고, 일을 잘하니까 월급을 올려줬을 뿐이다. 물론 점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 내내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산길을 걸어 강원도 통천까지 다녀왔다는 걸 보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긴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할머니 자신도 '조그만 인연을 잊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챙겨주니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단다. 
3년의 은혜를 60년 동안 갚은 것이다. 은혜는 베푼 사람보다 받은 사람이 더 잘 기억한다. 

내가 지금 '은혜를 베푼다'라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동이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나중 보상을 바라면서 키우지는 않는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어도 보상을 바라고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게 '내리사랑'이다.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는 너무 커서 그걸 다 갚기는 어렵다. 내 자식들에게 똑같이 해주는 게 은혜를 갚는 다른 방식이다.

정주영이 나중에 큰 기업의 사장, 회장이 될 거로 할머니는 생각했을까. 
그런 보상을 바라고 점원을 잘 대해줬을까. 아니다. 그저 현재 처한 상황에서 신뢰와 사랑으로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다만 정주영 회장이 그걸 큰 은혜로 받아들였고, 그 은혜를 끝까지 잊지 않고 갚은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게 사실 쉽지는 않다. 우선 은혜를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에게 베푼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가 아니라 나한테 이거밖에 안 해주냐며 서운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럴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은혜라고 생각은 하지만 갚을 형편이 되지 않거나, 그저 마음으로 감사하게 생각만 하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를 보면서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을까. 
나는 과연 은혜를 어떻게 갚았는가, 어떻게 갚고 있는가. 또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받았던 은혜는 얼마나 많을까. 차근차근 생각해 보고 있다. 

갑자기 은혜 갚은 까치, 은혜 갚은 제비, 은혜 갚은 두꺼비가 생각난다. 나는 그래도 까치나 제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손장환 작가
손장환 작가

손장환 작가 : 경동고,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
전 중앙일보 체육부장.부국장, jtbc 문화스포츠부장, 중앙북스 상무.
현 출판사 LiSa 대표.
저서로 부부 에세이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와 소설 '파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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