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해방군' 운운은 신의주 학생의거 희생자에 대한 모독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한병도(韓秉道. 1900~1976)는 한설야(韓雪野)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작품 수도 많거니와 내용도 문제적이어서 문학사 중심에 놓여 있는 작가이다.

월북 후엔 이기영과 함께 초기 북한 문단과 김일성 우상화 문학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 '탑'이라는 미완의 장편이 있다. 염상섭의 '삼대', 김남천의 '대하'와 함께 해방 전 '3대 가족사 소설'로 꼽힐 만큼 주제의식이 탄탄한 편이다. 

작품은 러일전쟁 전후 시기 이 땅에서 자행한 러시아인들의 만행을 적극 증언하고 있는 점에서 단연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작품에 그려진 러시아인 표상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동해안 일대에 출몰하여 고래를 잡아가고 무산과 울릉도의 나무를 베어가는가 하면, 동청철도회사(東淸鐵道會社)를 앞세워 북선 지방의 산 소(生牛)를 빼앗아 실어가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아예 주력 부대를 함경도 경성(鏡城)에 주둔시킨 채 수시로 조선인 마을에 출몰하여 약탈, 방화, 부녀자 겁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한설야는 '그들이 거쳐간 동리 처녀들은 얼마동안 구혼말이 뚝 끊어지고 동리에서 그 난리 중에 아이를 밴 계집들은 공연히 배부른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그러더니 지금은 또 그 뒤에 낳은 어린애들을 가지고 입싼 여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썽이었다'고 적었다. 

춘원 이광수가 '나의 고백'에서 증언해 둔 러시아인들의 만행도 이와 거의 일치한다.
내가 열두 살 되던 해는 계묘년이요, 서력으로는 일천구백삼 년이었다. 이해 겨울에 아라사 병정이 정주에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는 길로 약탈과 겁간을 자행하여서 성중에 살던 백성들은 늙은이를 몇 남기고는 다 피난을 갔다. 
젊은 여자들은 다 남복을 입었다. 길에서 아라사 마병 십여 명에게 윤간을 당하여서 죽어 넘어진 여인이 생겼다.
어린 신랑과 같이 가던 새색시가 아라사 병정의 겁탈을 받아 튀기를 낳고 시집에서 쫓겨나서 자살을 하였다. 

소와 도야지가 씨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에 어린 나는 우리 민족이 약하고 못난 것을 통분하고 아라사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그런데도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볼셰비즘이 점차 세계적 추세로 받아들여지면서 종주국 소련은 식민지 지식인들 사이에 어느새 미국을 대신하는 신흥 문명국으로 추앙되고 있었다. 

1922년 벽두, 미국이 주도한 '태평양회의'에 맞대응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무려 56명이나 되는 대표단이 참석한 것만으로도 당시 소련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신뢰와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인 단장인 김규식은 개회 연설에서 미국을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 매도하는 대신 소련을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중심지'로 추켜올릴 정도였다. 

러시아에 대한 우호적 인식은 1930년대 들어 좌파 지식인들 중심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김성주를 앞세운 채 '해방군'의 이름으로 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같은 인식이나 신뢰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한설야나 이광수가 증언하고 있는 바, 러일전쟁 전후에 이 땅에서 저지른 만행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약탈과 살생을 서슴지 않으며, 거리낌없이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무뢰배(無賴輩)였다. 

북한에 남아 있던 산업 시설의 30~40%를 뜯어내 실어가고 쌀 250만 섬, 소 15만 마리, 돼지 5만 마리를 약탈해 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해방군 아닌 점령군이나 가능한 만행이었다. 이에 실망한 고당 조만식 선생은 직접 소련군 제25군 치스차코프 사령관을 만나 '소련군은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소련군의 약탈상황은 비밀 해제된 소련군 기록에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해방 후 남과 북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차이를 비교해 보이는 데 가장 공을 들인 작가는 주요섭(朱耀燮. 1900~1976)이다.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의 동생이자 초기 장로교  목사 주공삼의 아들이기도 하다. 

해방 후 월남한 그가 남긴 '시계당 주인'이란 소설은 1947년 당시의 작품이니 일종의 기사나 다름없는 증언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은 '러스케'들에게 약탈당한 시계당을 폐문하고 집에 들어와 아내가 소련군에게 강간당하는 현장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증언한다. 
좀 길지만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시계방을 발견한 소련 군인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약탈하는 것이었다. 
군인 하나하나가 손목시계 열 개씩을 두 팔에 차고 너무 만족하여 개선장군들처럼 거리를 활보하며, 가끔 시계를 귀에 대보고는 히죽버죽하고, 재깍 소리를 멈춘 시계를 발견할 때에는 태엽 감아줄 줄은 모르고 길에 버리고 발로 밟아 으깨버리는 것이었다. 
(…) 생옥수수를 속째 우적우적 씹어먹고, 날생선을 뜯어먹고, 호박을 생째로 먹으면서 시계를 밟으며 깩깩 소리지르는 그들, 털이 부르르하고 우둔하게 생긴 소련 군인들이 징그럽고 더럽고 밉고 무서웠다. 

(…) 미친듯이 목이 쉬도록 만세 불러 환영했었고, 조선인 전체가 몇 해 동안 입에 대 보지 못한 쇠고기와 닭과 술을 실컷 대접했는데도 거기 대한 감사는 커녕 도리어 강도질로 보답하다니. 강도질은 또 약과-그저께 밤에는 아무개네 갓 시집온 색시를, 어젯밤에는 꽃같은 처녀를 겁탈하지 않았는가.
(…) 밤이 늦으면 남자에게도 통행이 위험했다. 소련 군인들 대부분이 무장강도들이기 때문이었다.(…)참다 못한 주민들은 자위책으로 골목마다 나무 판자로 담을 높이 쌓고, 밤마다 골목길 문 쇠를 잠가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해 놨건만, 둔하기 곰같은 러스케 군인들이 색시 사냥에 나설 때에는 그 높은 담을 원숭이 재주 이상 재주로 훌훌 넘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 다음에는 집집마다 잠자리 머리맡에 놋대야와 망치를 놓고 자다가 한 골목 안에 러스케가 침입하면 서로 놋대야를 두드려 여자들을 피신시켰다."
  
주인공이 월남 후 서울에서 본 미군의 모습은 평양에서 본 소련군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작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고 가끔 보이는 미국 군인들은 모두 너무나 깨끗하여 더러운 소련군과는 비교도 안될 뿐 아니라 거리에서 노략질하는 꼴도 눈에 안 띄고 더구나 시계방들이 버젓이 문 열고 영업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곧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살펴보니 노략질 당한 흔적이 없고 진열이 잘되어 있었으며 어느 새 영문으로 쓴 간판이 다 달려 있는 것이었다.
 
단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일축해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강원용 목사의 자전적 체험기 '역사의 언덕에서'(2003)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회령 발 서울행 열차 안. 소련군이 올라와 젊은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나갔다. 곱상하게 생긴 남자 일행을 여자로 착각해 끌고가는 것을 목격한 강 목사는 회령에 남겨 둔 아내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생명이 위태로운 때는 너무 세게 나가지 마시오'라며 충고했다. 
혹 소련군에게 욕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해방 후 월남한 함석헌 선생은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사건'(1971)에서 반소(反蘇) 시위에 나선 어린 학생들에게 기관총질을 해 댄 소련군 만행을 증언하고 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경기도 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해방 이후에 들어온 소련군은 해방군이었고, 미군은 점령군이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여권의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떠오른 이재명 경기지사가 2차 대전 종전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표현하며, 집권하면 미국에 사드 기지 철수를 요구하겠다며 또 한 번 여론을 자극했다. 

사리 분별을 소홀히 한 채, 거칠고 자극적인 언어나 표현을 통해 사회 갈등을 유발하고 편 가르기를 서슴지 않는 공인들의 행태가 이미 식상할 지경에 이른 지 오래다.
'점령군'과 '해방군'의 사전적 의미만이라도 좀 제대로 확인했어야 할 일이다. 

누가 해방군이고 누가 점령군이었는지는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오늘의 남.북한 현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가. 
미군이 점령군이고 소련이 해방군이었다면, 점령군 밑에서 이뤄낸 남(南)의 성취는 축복이고 해방군 밑에 추락한 북(北)의 실패는 재앙일 것이다. 

역사에 대한 무모한 정치적 개입이나 간섭은 자칫 불행한 역사를 자초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웃나라들의 극우화가 두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1945년 11월 23에 있었던 신의주 학생의거에서는 모두 23명의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해방 후 북한 지역을 점령했던 소련군을 두고 해방군 운운하는 것은 이들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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