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 분열보다 도의적 책임 고백할 때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현민 유진오(玄民. 兪鎭五, 1908~1987)는 제헌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이자 고려대 총장을 지낸 교육자, 야당 총재를 지낸 정치인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김강사와 T교수', '창랑정기', '화상보' 등을 통해 문학 쪽에 선명한 자취를 남긴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가 쓴 작품 중에 '오월의 구직자'(조선지광, 1929. 9.)라는 것이 있다.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취업난을 제재로 한 소설이다

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주인공 찬구는 '영락해 가는 양반'의 잔 부스러기의 하나였던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홀로 가족들의 생계를 떠안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당장 취직을 해야 할 형편이지만 여의치가 않다.
치열한 취업 경쟁 속에 친구들은 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하지만 찬구는 그러는 친구들의 행동이 비열하다고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겹게 생각되기도 한다.

학생들의 취직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학생주사 T다. 그러나 찬구는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 그와 여러 차례 갈등을 빚는 바람에 눈 밖에 나 좀처럼 그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 사이 살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오갈 데 없이 된 가족들은 찬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다급해진 찬구는 어쩔 수 없이 와이셔츠 하나를 사 들고 T의 집을 찾아가 한껏 몸을 낮추었다.

찬구의 항복을 받은 T는 내심 흡족했다. 그리고 찬구는 마침내 그의 추천을 받아 어느 회사에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 된 줄 알았던 취직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T의 추천장은 속임수였던 것이다. 낙방 통지서를 받던 날 찬구는 가족이 모두 상경하겠다는 편지를 함께 받았다.

작품 외연에는 식민지 시기 우리 사회의 심각한 취업난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는 민족의식을 와해하고 순치시키고자 하는 식민주의의 간교성을 고발하는 데 더 많은 무게를 두고, T선생에 맞서다 결국 머리를 숙이고 만 찬구를 통해 일제 식민주의에 맞서 의식의 순결성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강고한 식민주의 계략 앞에 민족 공동체가 분열되고 타락해 가고 있음을 고발하면서, 어린이 날 행렬을 바라보던 찬구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통해 이 같은 절망적 상황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시험이나 취업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모든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다.
그런 만큼 그 공정성 여부는 사회의 건강성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이 공정성이 구성원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사회는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과거 시험의 공정성이 크게 훼손되면서 조선 왕조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선거의 공정성을 무시한 독재자들이 예외 없이 비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다시 여론의 중심에 서 있다. 지난 2일 한길사에서 출간된 회고록 '조국의 시간'이 다시 그를 소환한 것이다.
책은 출간 하루 만에 무려 10만 부나 팔려 나간 뒤 줄곧 온.오프라인 판매 1위를 달려 2주 만에 판매 부수 20만 부를 넘어섰다는 소식이다.

책에는 조국 전 장관이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와 그에 관한 저자의 심경이 담겨 있다고 한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정치권이다.

정파에 따라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국면에 미칠 이해득실을 따지며 발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책이 출간된 날 서둘러 대국민 사과 연설을 한 집권 여당 송영길 대표의 대응이 눈에 띈다.

지난 4월의 재·보궐선거 참패 요인 중 하나가 '조국 사태'로 불거진 집권 여당의 '내로남불'이미지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대로 두면 자칫 대선 정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재집권에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송영길 대표는 국회에서 '국민 소통·민심 경청 프로젝트' 대국민 보고회를 가진 자리에서 '국민과 청년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을 다시 한 번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자 강성 '친문' 세력이 송 대표의 사과를 격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을 의식한 대권 주자들이 경쟁적으로 조국을 엄호하고 나서기도 했다.

2019년 8월 이후 불거진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조국 당사자는 정작 지금껏 그 흔한 '도의적' 책임 한 번 제대로 표명한 적이 없이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일관하고 있다.
사과의 형식이나 내용도 그렇거니와, 여권 어디에서도 사과의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과가 도무지 사과 같지 않은 건 당연하다.

사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의 핵심은 우리 사회 공정의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는 점이다.
부모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온당치 못한 방법으로 자녀의 진학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는 입시와 취업이 누구에게나 일생일대의 최대 관문이 되어 있는 국민들로서는 충분히 공분을 일으킬 만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입시와 취업에서의 공정성은 선거의 공정성 못지않은 민주사회의 근간이다.
나는 사태의 와중에서 자주 서울의 노량진 고시촌을 떠올렸다.
일 년 내내 전국에서 모여든 재수생들과 취업 준비생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동기가 다양한 만큼 사연도 많아 자주 언론에 조명되기도 했다.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일체의 낭만을 유보한 채 벌집 같은 고시원과 학원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다.
오로지 입시나 취업에 목을 매고 있는 젊은이들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대표적 서사 공간이 이곳 노량진 고시촌이다.

길바닥 위에 선 채로 3천 원짜리 종이컵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컵밥 거리의 젊은이들.
잠은 언제 잤는지, 이른 새벽 시간부터 나와 육교 위까지 길게 줄을 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학원생들.

조국 교수가 이곳 고시촌 젊은이들이 아프게 견디고 있을 상실감이나 박탈감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저마다 안타깝고 절실한 이곳 젊은이들의 사연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토록 용기 있게 고개를 곧추세운 채 한사코 '아비로서의 정'을 운운해가며 떳떳해 할 수 있을까.

부부 함께 사회적 인맥을 이용해 아들 딸의 입시를 지원한 일련의 혐의들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법원 판결 이전에 벌써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앞서 경험한 정유라 사건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유린되어 온 불공정 경쟁구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슬픈 민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심 법원은 조국 부부의 혐의를 대부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남아 있는 조국의 시간은 이제라도 아주 겸허하게 나라를 온통 소모적 논쟁 속에 몰아넣고 국론을 분열시킨 데 대한 도의적 책임부터 고백해야 할 때이다.

집권 여당의 참패로 끝난 지난 보궐선거와 사상 초유 30대 제1야당 대표의 출현은 지금이 바로 '조국의 시간'이 아닌 '국민의 시간'임을 알리는 엄중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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