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운동권 주류....종교적 독단주의와 다를바 없어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불꽃'의 작가로 잘 알려진 선우휘(1922~1986)의 작품 가운데 '십자가 없는 골고다'(1965)라는 것이 있다.

지식인 소설 범주에 드는 단편으로, 무책임한 말의 성찬만 앞세울 뿐 행동에 이르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허위를 고발하고 있다.
중심인물은 지식인 'K. 김'과 노동자 '이칠성'이다.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해 대중조작이 자행되던 시대가 배경임을 암시하고 있다.
두 인물은 그러한 시대 상황을 답답하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중학교 교사와 국군 장교를 거쳐 신문사에 복귀한 지식인 K.김은 아무 것도 해낸 게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반성하면서도 여전히 '상식적인 처세'로 일관할 뿐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동료들과 어울린 술자리 대화를 통해 국토를 국제 입찰에 부치는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그것은 월간지 S에 논문을 발표한 H옹의 구속 여부가 주목될 만큼 답답한 시대 상황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이자 취중농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참된 현실적 대안으로 믿고 국제 입찰을 실현시키기 위해 투신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바로 대장장이 노동자 이칠성이다.

그는 앞장서 국제 입찰 청원 운동을 전개해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얻기까지 했으나 결국엔 서명에 참여한 대중들의 집단적 폭력에 희생되고 만다. 그리고 K.김은 이칠성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는, 혹은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 현실에 부닥쳐 정신이상자로 몰리고 만다.  

작품 제목에 쓰인 '골고다'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작은 언덕이다.
우리나라 서소문 밖, 당고개, 새남터, 양화진과 같은 형장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던지 그 뜻이 '해골의 골'이라고 성서는 적고 있다.
예수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메고 이 언덕에 올라 처형당했다.

고대 카르타고, 애급, 앗수르 등에서 행해지던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까지 전해져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 때는 하루에 5백 명 이상의 죄수들이 이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도 했다.예수는 이곳에서 모진 고문끝에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뒀다.

예수를 매단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으나, 예수로서는 자기희생을 통한 대속과 구원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가없는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감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십자가 없는 골고다'란 있을 수 없다.

죄 없는 예수의 희생을 통한 대속과 구원, 이를 통해 구현된 인류 사랑의 대업이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는 골고다에는 증오와 분노와 명리(名利)만 있을 뿐이다.

자녀 입시비리 혐의 등으로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조국 교수가 '피할 수 없는 운명, 가시밭길' 등의 수사를 써가며 한사코 진실을 호도하더니 급기야 일부 열혈 지지층 사이에선 십자가를 진 예수에 빗댄 희생양 코스프레까지 나타나 실색하게도 했다.

(조국 교수 부인)정 교수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 대신 십자가를 졌다'는 여당 의원도 있었고, '그는 당당히 죽음의 길을 걸었다. 골고다 언덕길을 조국과 그의 가족이 걸어가고 있다. 가시왕관이 씌워졌고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맛 칼럼니스트'도 있었다.

이 무슨 망발인가. 도무지 필설로 옮기기조차 어려울 만큼 부끄럽기 그지없는 우리 지식인 사회의 교양적 수준이다.
골고다 언덕에는 서로 다른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병정들이다. 시몬은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오른 사람이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으나 억지로나마 예수의 구속사에 참여한 영예를 얻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난 뒤 그 옷을 두고 제비뽑아 나누어 가진 무리들이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도 오로지 이욕(利慾)만 챙긴 무리라는 오명을 얻었다.

문재인 정부 4년을 두고 흔히 '운동권 독재' 시대로 규정한다.
지난 전두환 정권 이래 지금처럼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은 없었으니 '독재'라 한들 억울할 일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운동권 독재란 비판에는 일말의 불만이 있을 법도 하다.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운동권이란 과거 군사독재에 저항해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운동권 독재란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울릴 수가 없는 언어 조합이다.

전북대 강준만 명예교수는 최근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6월 25일에 있었던 검찰 중간 간부 인사를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의 극치로 보면서, 장기간 편 가르기와 내로남불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심리상태는 종교적 신념 이외엔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비판했다.

종교적 신념만큼 쉽게 독단주의에 빠져드는 경우는 없다. 과거 운동권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 대거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거나 지원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재인 정권이 이렇듯 독단주의에 빠져든 것은 이들 운동권 세력의 과거 경력이 사실은 '십자가 없는 골고다' 체험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반증이다.

민주화를 위해 십자가를 진 희생양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매단 십자가 앞에서 예수의 옷을 걸고 내기하던 로마 병정과 같은 무리일 뿐이다.
운동권 경력을 배경으로 권력의 상층부 진입에 성공한 사람들이 현 정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현 정부가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는 이전의 보수 정권 시절보다 무엇 하나 나아진 게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게 없다.
현실 개변(改變)을 부르짖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다만 운동의 역사나 운동가들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소환해 대중을 선동하고 자신들 '이기적인 생존 전략'에만 충실해 있는 운동권 독재의 폐단이다.

예수가 오른 골고다는 자기희생의 제단이었다. 십자가는 없이 골고다에만 오르려는 사람은 무책임한 선동가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나 민족을 위해 헌신을 각오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구레네 시몬처럼 강요된 십자가라도 지고 오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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