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사와 연극사의 산증인이자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 온 이순재가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유족 측은 “고인이 오늘 새벽 영면했다”고 전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방과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며 성장했다.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시절 영화를 접하며 연기의 길로 들어섰고,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이후 1960년 KBS 1기 탤런트, 1964년 TBC 1기 전속 배우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브라운관 시대를 열었다.

고인의 연기 인생은 69년여간 쉼 없이 이어졌다. 출연작만 140편이 넘으며 단역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특히 1990년대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 역을 맡아 시청률 65%라는 대기록을 견인했고, ‘허준’, ‘상도’, ‘이산’, ‘토지’ 등 굵직한 사극과 시대극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순재는 끊임없이 변신하는 배우였다. 70대에 접어든 2006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출연해 근엄한 이미지를 벗고 ‘야동 순재’라는 파격적인 캐릭터를 소화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어진 ‘지붕 뚫고 하이킥’과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는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사랑을 받았다.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장수상회’, ‘앙리할아버지와 나’ 등 연극 무대를 꾸준히 지켰으며, 2021년에는 연극 ‘리어왕’에서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히 소화해내며 ‘대배우’의 품격을 증명했다. 2023년에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하기도 했다.

연기 외에도 다방면에서 족적을 남겼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 국회의원으로서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 등으로 강단에 서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직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 혼을 불태웠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는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평소 “연기는 평생의 숙제”라며 완벽을 추구했던 고인의 60여 년 연기 인생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 그 자체였다. 빈소와 장례 절차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