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중심부를 지나 갑천으로 흘러드는 대전천은 대전의 추억을 알고 있을까.

흘러가는 것은 단지 강물만이 아니다.

눈물겹게 지나간 지난날의 추억의 이야기.

그 추억의 소리를 쫓아 발길이 멈춘 곳.

대전 동구 인동에 위치한 용신 대장간.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어리를 수천번 두드리면 제법 모양이 갖춰진다.

처음엔 그저 한낱 쇳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 칼이 되고, 호미가 된다.

쇠도 녹일 듯한 화덕의 열기를 견디고 묵직한 쇠망치를 온 몸에 얻어 맞고 나서야 쓸만한 도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오래 전부터 쇠를 다듬어 도구를 만들어오던 방식이다.

손놀림이 예사롭지가 않다.

고아였었던 할아버지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본인들에게 대장간 기술을 배우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3대째 이어져오고 있다.

부친께서 살아생전에는 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면서 '그때 그 용신대장간'이라는 상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살아 숨쉬고 있다.

 

[이호일 / 용신대장간 사장]

처음 할아버지 때는 간판 없이 철공소로 시작.

주변의 권유로 간판을 철공소에서 대장간으로 변경했다.

조부 때부터(일정시대) 시작한 대장간.

힘은 들지만 마음이 편해 좋다.

일반 칼보다 10배나 비싸지만 좋으니까 찾는다.

지금까지 버텨나온게 제품이 좋으니까 이어져오고 있다.

30년 해야 좀 나온다.

쇠로 무엇을 만든다는 게 쉽지는 않다.

35년을 지나니까 기술이 조금 나온다.

꿈 속에서도 만들어지더라.

40년이 지나니 누가 얘기하면 머리속에서 떠 오른다.

옛날에는 풀무질부터 시작.

75년도 학교 다닐 때는 쇠망치(오함마) 일 엄청했다.

쇠망치(오함마) 일하지 않으려고 군에 지원해서 갔다.

80년대 제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다.

엄청 힘들어서 10년 전에 우울증으로 술로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문 닫으려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연락이와서 지금까지 하게 됐다.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도, 파란 많던 세월도 이제는 불구덩이에 녹아 내려 하나의 장인으로 승화되었다.

대장간은 쇠를 달궈서 때려 늘리는 거고, 목수는 깎는다는 말이 있다.

800여 가지의 품목을 만들어낸다는 이호일 사장은 돌아가신 부친은 한 번도 칭찬을하시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장인정신이 투철한 부친의 눈에는 아들의 일이 미덥지 못하셨으리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대전 동구 인동에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옛날, 대전에서 미곡상이 가장 많이 몰려 있어 번화가였던 동구 인동시장.

이곳에서 일제강점기 때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그 역사의 현장 끝자락에서 옛 모습 그대로 추억 끝에 매달려 있는 동화극장을 발견한다.

1950년 경에 세워진 동화극장은 왕성했던 6, 70년대 대전에서는 그런대로 알아주는개봉관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시간의 흐름에 밀려나면서 지금은 극장주와 함께 추억 속에 묻히고 있다.

 

[심종순 / 동화극장 사장]

돈 벌려는 것보다 예전부터 해 오던 것이니까 지금까지 하고 있다.

서울 공보부에서 허가로 한 달분이 내려온다.

입장료는 5천 원을 받고 있다. 관객은 주말에만 조금있다.

현존하는 옛날극장은 대전 시내 현재 동화극장뿐이다.

관객은 대전 관객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온다.

 

벽에 겹겹이 쌓인 달력은 극장이 지켜 온 세월을 말해준다.

이 곳이 분명 극장이라 외치고 있는 관람자 준수사항.

지난 세월을 모두 알고 있는 저 괘종시계.

세상 시계보다 느리게 산다고, 행복함이 부족하거나 늘지는 않으리라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 탓에 이곳의 모든 풍경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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