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현충원 찾은 천사들

23일 묘역정화 봉사 현장

지난 23일 국립대전현충원. 손자 오 씨가 할아버지 묘 앞에서 큰 절을 하고 있다. / 뉴스티앤티
지난 23일 국립대전현충원. 손자 오 씨가 할아버지 묘 앞에서 큰 절을 하고 있다. / 뉴스티앤티

"할아버지, 몸 건강히 잘 계셨죠? 오늘은 고마운 분들이 참 많이 오셨어요"

지난 23일 국립대전현충원. 한 남성이 묘비 앞에 주저앉아 안부를 물었다. 앞에는 소주 한 병과 과자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오모 씨(37)는 묘 앞에서 큰 절을 두 번하고 "바쁘다고 잘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저 말고도 챙겨주시는 분들이 많았네요"라며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오 씨의 할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당시 벌어진 여러 전투에 참가해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하지만 참화에 따른 부상으로 오랫동안 지병을 앓았고 그 여파인지 몇 해 전 이곳에 안장됐다. 할머니도 그 옆에 같이 묻혔다.

 

현충원 묘역에 일회용 소주잔이 버려져 있다. / 뉴스티앤티
현충원 묘역에 일회용 소주잔이 버려져 있다. / 뉴스티앤티

이날 대전현충원에는 호국영령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이들을 기억하려는 봉사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봉사자들은 연말연시임에도 화려한 조명과 인파가 북적이는 시가지를 찾지 않고 이른 아침 매서운 한파를 뚫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에게 온정을 전하기 위해 모였다.

오 씨는 "유가족도 아닌데 찾아와 돌봐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날 10여 명의 봉사자들은 현충원 보훈미래관에서 짧은 교육을 받고 묘역 내 비석 닦기, 잡초제거, 주변 쓰레기 수거 등 정화 활동을 펼쳤다.

장병 제1묘역에서 만난 정모 씨(35)는 최근 개봉한 영화 '노량', '서울의 봄'을 보고 현충원을 찾게 됐다고 한다.

매서운 강풍 탓에 두꺼운 롱패딩으로 몸을 감싼 정 씨는 묘비 위 눈과 나뭇잎을 정성스레 털어내고 있었다.

그는 묘 주변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으며 "이분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며 "연말 도심과 달리 많이 쓸쓸한 것 같아 절로 가슴이 미어진다"고 토로했다.

 

묘역 정화 봉사를 온 박 씨가 쓰러진 꽃병을 세우고 있다. / 뉴스티앤티
묘역 정화 봉사를 온 박 씨가 쓰러진 꽃병을 세우고 있다. / 뉴스티앤티

묘역 정화 봉사를 처음 왔다는 박모 씨(28)도 묘비 주변 시든 생화와 소주잔 등을 치우고 강풍에 깨진 꽃병을 바로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날카로운 추위로 볼이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그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며 "일반 거리 청소보다 더 마음이 써진다. 지금 이 편한 삶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 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편,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선조들의 위훈의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설립된 대전현충원에는 약 14만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다.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300만여 명의 참배객들이 발길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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