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6군단 하사관학교

25사단 하사관들의 군기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6군단장 소장 최홍희 장군으로부터 “25사단 이 중위, 군단 하사관학교에 와서 군단 내 하사관 태권도 교육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홍희 군단장은 태권도 제일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내가 군단 내 유명 장교가 된 것은 내게 교육을 받았던 25사단 하사관들의 입소문 때문이었다. 내 교육이 “엄청 빡세다!”는 소문이 군단 내 다른 사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소문을 들은 각 부대 육사 선배들이 내게 격려와 찬사의 편지를 써 보내는 해프닝도 이어졌다.

“이봐, 이 중위. 살살 해. 우리 선임하사는 잘 좀 봐주라고.”

봐줄 것도 없었고 봐줄 일도 아니란 건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을 터다. 그들은 결코 내 교육 방식이 싫지 않아 응원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딜 가든 “이 중위”를 부르며 나를 한껏 치켜세우는 바람에 부족한 게 많았어도 우쭐하는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인지라 그때는 정말 내가 잘하고 있어 그런 줄 알았다.

 

중대장

6군단 하사관학교에서 임무를 마치고 25사단으로 복귀하여 수색중대 부중대장 임무를 수행하던 중 군단 주최 예하 각 사단과 직할부대 대항 운동 경기에 25사단 대표 책임자로 선발되었고, 합숙훈련을 통하여 종합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선수 선발부터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은 물론 사단 참모장의 책임하에 숙영시설, 급식, 운동복, 운동화, 운동기구 등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사단장 김재명 장군이 숙영지를 직접 방문하여 애로사항이 있으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동두천 소요산에서 선수를 위한 자축 파티가 사단 주요 지휘관 등이 참석하여 군악대의 사단가가 울려 퍼지면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선수 등은 포상휴가를 받았다. 나는 장기간 부대를 비워야 했기 때문에 휴가를 반납하고 부대로 복귀하여 전방 수색중대원들의 지원과 특공무술도 교육시켜야 할 입장이었기에 대답은 했지만 휴가 갈 입장은 아니었다. 사단장은 본부좌석 끝에 앉아 있는 나에게 “이 중위 육사 15기라고 들었는데, 중대장 해야지”라며 연대장들을 돌아보자 72연대장 김익설 대령이 “저의 연대에서 중대장 시키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사단장님 저는 육사 졸업한 지 3년밖에 안 됐고, 중위라 안 됩니다.”라고 하자 “무슨 소리야. 육사 4년에 3년이면 7년 아닌가? 충분해.”라고 했다. 나는 내심 싫지 않았다. 170여 명의 중대장을 멋있게 할 각오가 섰다. 파티가 끝나자 72연대장은 “내 차에 타라. 나하고 같이 가자.”

4월 25일 3대대장 안수성 중령 주재하에 지휘관 휘장을 가슴에 달고, 어깨에 파란 지휘관 견장을 붙이고, 연대 내 인접 중대장들의 참석하에 취임하였다. 중대원들은 이름만 듣던 이 중위가 누굴까 호기심 어린 눈초리였다. 취임사는 간단했다. 나에게는 여기 서 있는 중대원과 국가만이 있을 뿐이다. 불가능은 없다. 우리 중대는 적 대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무적의 11중대는 승리와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함께 싸워 이기자.

육군에서는 중대장(대위, captain)부터 지휘관이다. 지휘자와는 개념이 다르다. 그래서 지금도 준장으로 여단장을 한 것과 소장으로 사단장을 한 것보다 중위로서 중대장 한 것을 군 생활 중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위를 중대장으로 시켜주신 김재명 사단장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군사 사전과 영한사전에 captain은 육군, 공군, 해병대의 대위와 해군에서는 대령이며 함(선)장을 일컫는 표현으로 각 군의 지휘관이다. 일명 우두머리(boss, chief)를 통칭한다. 군에서는 중대장 이상에게 지휘관이라 칭하며, 가슴에 철제 휘장을 패용하게 되어 있다.

1962년 8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인 윤필용 대령이 72연대장으로 부임하였고, 9월에는 황필주 준장(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으로 25사단장이 교체되었다. 신임 사단장은 참모장에게 전속부관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참모장은 참모들과 토의 끝에 나를 전속부관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하고, 나를 참모장실로 호출하였다. 참모장은 사단장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약식 자력표를 작성하였고, 사단장이 군단 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면 최종 결재심을 받기 위해 호출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참모장님! 저는 중대장을 4개월밖에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자 참모장은 경력에 지장 없도록 중대장 직책으로 놔두고 사단장님 전속부관으로 보좌하기를 권했다. 나는 정색하면서 “참모장님, 이중 보직은 안 됩니다. 저는 실제 경험이 필요합니다. 제가 중대장을 해보니 굉장히 중요한 직책입니다. 중대장을 하지 않고는 대대장도 연대장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중대장 보직을 마치고 모실 수 있도록 사단장님께 건의해 주십시오!”라며 하지 않겠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정중히 말하고 부대로 복귀하면서 생각했다. 4개월 전 중대장 취임을 하면서 “나에게는 중대원과 국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중대는 적 대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함께 싸워 이기자”고 다짐했던 취임사가 생각났다.

전속부관을 사양한 나에게 군단장 전속부관을 하고 있는 동기생 K 중위가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가 군에서 윗분 모시면서 많은 장군들을 알게 되면 진급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에 “글쎄, 자네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 하며 군인답지 못한 그의 말에 다음에 보자며 식사를 사양하고 돌아왔다.

 

훈련 시 흘린 땀은 전투 시 피를 대신한다

군인의 3대 요소는 전술, 체력, 정신이다.

개인화기 사격을 위시하여 수류탄 투척, 총검술, 참호격투, 침투(기만, 기습), 대침투(수색, 매복), 유격, 화생방(방독면), 하천선(도하), 전차(공격), 대전차(방어), 특공훈련, 헬기레펠(공중침투, 탈출), 진지 및 개인호(구축), 동계(설한), 하계(혹서, 강우), 근접전투, 야간, 산악, 생존, 구급법, 주 2회 이상 200고지의 산악점호와 저격병 사격훈련, 공용화기(기관총, 박격포, 로켓포)의 숙달 훈련을 하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지휘관은 중대장인 대위다. 육군은 중대장, 소대장, 선임하사, 분대장이 최일선 지휘자다. 내게 어느 직책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중위로 중대장을 수행한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중대장이 최고다.

중대 테스트는 연대에서, 대대ATT는 사단 주관하에, 연대RCT는 군단 주관하에 훈련 평가를 받는다.

미리 알고 미리 막는 슬기로운 간부가 되자. 무능한 간부(상급자)는 적보다 더 무섭다. 왜냐하면 적과의 전투에서 부하들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슬기로운 간부를 목표로 나는 중대장이 끝나면 대대장 준비, 대대장 끝나면 연대장 준비, 연대장 마치고 공수특전여단장 할 때는 사단장 준비를 하였다. 보병장교로 부족한 포병전술을 인접 부대 33사단 포병연대장인 엄섭일(육사 19기 전 포병학교 포술학교관) 육사 후배를 저녁 7시에 불러 매주 2번씩 2개월간 포병 교육을 받았다. 1982년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최강의 포병연대로, 군단장, 군사령관, 참모총장을 하면서 전군 포병을 강력한 화력 지원 부대로 양성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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