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고려 말기의 문신 이제현(李齊賢)이 쓴 시화집 중에 '역옹패설(木+樂翁稗說)'이란 게 있다.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 최자의 '보한집(補閑集)'과 더불어 고려시대 3대 시화집으로 꼽힌다.

'역옹패설'이란 직역하면 '상수나무 같은 늙은이가 쓴 피같은 이야기'쯤 된다. '(역)木+樂'은 '상수리나무 역'자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대표적인 나무로,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 중 하나다.

우리나라 '국민음식' 중 하나인 도토리묵 재료로 쓰이는 상수리가 열리는 나무니 꽤 귀하게 여겼을 법한데 역설적이게도 아주 쓸모없는 나무의 상징처럼 여겨왔다.

옛 선조들은 사물의 본질적 효용 가치를 중하게 여겼다. 나무의 본질적 기능은'재목(材木)'이다. 집을 지을 때 사용되는 쓰임새로서의 기능을 가리킨다.

재목의 기준에서 볼 때 가장 으뜸가는 나무는 소나무이고 반대로, 가장 별볼일없는 나무는 상수리나무였다.

재목이 되려면 무엇보다 나무가 곧고 키가 커야 한다. 그래야 기둥, 들보, 서까래, 중방 어디에나 쉽게 골라 쓸 수 있다.

내구성도 재목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다. 습기나 해충에 강해 쉽게 썩지 않고 오래 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마름질하기에 편리해야 한다. 톱이나 대패같은 연장을 잘 받아 손질하기가 편리한 대신 쉽게 트거나 갈라지지 않아야 한다.

선조들은 경험상 이런 모든 조건에서 소나무가 가장 우월한 나무임을 알아낸 것이다. 이 점에서 상수리나무는 가장 뒤쳐진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키는 커도 곧질 않아 쓰임새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습기나 해충에 약해 썩기 잘하고, 쉽게 상한다.

한 때 장안의 종이 값이 오를 만큼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모 교수의 책에 참나무가 철도 침목에 많이 쓰인다는 내용이 실린 것을 보고 의아했다.

물론 오류다. 참나무는 습기에 약해 침목으로 쓰일 수 없다. 침목에 쓰이는 나무는 주로 밤나무 종류다.

밤나무는 습기에 강하기로 나무 중에 으뜸이다. 그래서 옛적 시골에서 돼지우리나 변소 등을 지을 때 주로 밤나무 기둥을 주춧돌도 없이 직접 땅에 박아 세웠다.

썩는 것도 대조적이어서 밤나무는 속부터 썩는데 참나무는 겉부터 썩는다. 꼭 스티로폼 부서지듯 하얗게 문드러져 날린다.

참나무는 나무 질이 단단하여 연장을 잘 받지 않기로도 대표적이다. 못이 안 들어갈 정도다. 그 밖에 결이 너무 좋아 잘 쪼개진다거나, 무거워 운반이 어려운 것도 재목으로서의 흠결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나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은 것은 중요한 식재료가 되는 열매, 숯을 굽거나 땔감으로 으뜸가는 효용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표고버섯 재배용으로 단연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쯤 되면 '역옹', '상수리나무 같은 늙은이'란 의미는 대강 드러내 보인 셈이다

'쓸모없는 늙은이'가 그것이다. 이제현은 만년에 '역옹'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패설'이란 '피같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피는 논에서 벼와 함께 자라는 대표적인 잡초다.

잎과 줄기는 벼를 꼭 빼닮았으나 열매는 전혀 다르다. 끼니를 제대로 때울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살림을 두고 '피죽도 못 먹는 가난'에 비유하고,

기운을 쓸 수 없어 비실거리는 사람을 보고 '피죽도 못 먹었느냐'고 한다.

피는 곡식같지 않은 곡식, 차마 곡식이랄 수도 없을 만큼 효용 가치가 하찮은 곡식을 은유한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애완용 새 가게에서 새 모이용으로 팔았으나 지금은 새 모이용으로도 쓰이지 않게 된 피. 사람이 식량으로 삼는 곡식의 본질적 효용은 한 번 먹으면 오랫동안 기운이 돌게 하는 근기(根氣)에 있다.

선조들은 많은 곡식들 중에 근기 있기로는 쌀(그중에서도 찹쌀)이 으뜸이요 피가 꼴찌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아낸 것이다.

그러므로 패설은 피처럼 '쓸모 없는 이야기' 즉, 아무런 공리적 가치 없이 그저 재미나 제공하는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를 뜻한다.

그러면 사람의 본질적인 쓰임새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일(노동)'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고 반대로, 일할 줄 모르는 사람, 일하지 않는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인 것이다.

일은 놀이의 대립 개념이다. 일은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한 생산 활동이지만, 놀이는 생산과는 아무 관계 없이 다만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선 일과 놀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일이 놀이를 위한 것이고, 놀이가 일을 위한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아니, 일 자체가 놀이인 사람도 있고 놀이 자체가 일인 사람도 있다. 일은 기본적으로 주체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 기여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일을 국방·납세·교육 등과 같은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일은 국민 모두의 권리이기도 하다.

마땅한 일자리를 얻어 능력껏 일함으로써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권리. 현대 국가는 국민의 이같은 권리를 보장해 줄 의무를 지도록 요구받는다.

우리 국민의 기대 수명이 높아지면서 고령 인구 문제가 심각한 현안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탕발림식 복지 정책을 내놓았다 거둬들였다 하는 것 말고는 보다 거시적으로 국가 발전과 연계된 지속 가능한 장기 대책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이다.

60대 초반의 나이에 일자리에서 밀려나면 하루 아침에 상수리나무 같은 늙은이 신세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식당이나 대형 판매점, 비행기 승무원 등과 같은 대면 서비스업 종사자들 중 6,70대 나이 든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웃나라 일본 여행길에 적어도 70은 돼 보이는 할머니가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별난 숙련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 단순 일자리를 노동력 왕성한 2,30대 젊은이들이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일자리 현실은 분명히 왜곡된 것이다.

최근 현대차 생산직 공채에서 보듯, 대기업이나 공기업엔 몰려드는 인력이 구름같은데, 중소기업이나 농어촌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목을 매는 현실은 아무래도 걱정스런 현상이다.

70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 소리를 듣는 게 일반적 현실인데 은퇴 후엔 고작 깃발 단 오토바이 타고 산불 감시하러 다니는 일자리나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현실도 정상은 아니다.

노인 문제는 이제 거시적인 국가 미래 전략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지 기껏 지하철 승차 요금을 얼마나 면제해 줄 것인지, 임플란트 시술비를 몇 개까지 지원해 줄 것인지 등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과 같은, 고식적 복지 차원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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