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들 선심성 복지공약...베네주엘라 몰락 새겨야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민담이나 소설같은 이야기 문학에는 장애인 얘기가 흔하다. 
그것은 시가 대표적인 노래문학과는 달리 이야기를 듣는이와 이해나 감동을 함께 해야 하는 이야기문학의 숙명적 특성 때문이다. 

노래는 혼자서도 즐길 수 있지만, 이야기는 듣는 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형식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듣는이를 염두에 두다보니 이야기는 자연히 듣는이의 흥미와 관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문학이 대중성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근대 이후 여러 문학 양식 중 소설이 단연 대표적인 양식이 될 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대중성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때문이며, 역설적이게도 이 대중성은 스스로의 수명을 갉아먹는 독이 되기도 했다. 

대중은 아주 변덕스러워서 항상 새롭고 더 자극적인 재미를 갈망하며, 이런 대중에게 소설은 이제 더이상 매혹적인 장르가 아니다. 
대중은 이제 소설이 아닌 갖가지 영상매체 앞에 열광하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이 사회적으로 흔치 않은 별스런 인물들을 자주 불러들이는 것은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옛 소설들은 흔히 범상치 않은 영웅들을 즐겨 내세운 대신 근대 이후엔 주로 고아 . 장애인 . 매춘부 . 범죄자 . 모험가 . 알콜 중독자같이 주류에서 소외되었거나 사회적으로 일탈된 인물이 자주 소환되었다. 

이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불안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장차 사회적 질서나 규범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가능성이 소설 속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이끄는 힘이다.

유재용(柳在用. 1936~2009)은 1980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관계'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희의 끝'(1980)이라는 게 있다. 
우리사회의 복지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대표적인 '장애인소설'이라 할 만하다. 

작중에서 '외팔이'라 불리는 주인공 이병태는 어려서 포탄을 가지고 노는 아이 옆에 서 있다가 사고를 당해 한쪽 눈과 팔을 잃은 장애인이다. 
칠순 가까운 노모와 함께 사는 스물네 살 젊은이지만 모자 모두 자립 의지나 현실 극복 의지같은 것은 전혀 없이 작은 아버지가 보태주는 지원금으로 살면서 공술 얻어 먹고 주정이나 하는 게 일상이다. 

이들 모자는 방이 셋이나 되는 값비싼 집을 가진 '유주택자'다. 
그러나 이들은 방 둘을 남에게 세 주고 자신들은 아랫방에 나앉아 셋방살이 하듯 살고 있다. 
일부러 없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의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해 계산된 청승이다. 

노모가 사람을 볼 때마다, 죽었으면 딱 좋겠으나 병신 자식 못미더워 죽지 못한다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외팔이는 교활하고 영악(獰惡)하기까지 하다. 기회만 닿으면 사람들에게 어깃장을 놓고 시비를 걸어 술이나 돈을 뜯어낸다.
때론 속임수를 쓰기도 하고, 칼을 품고 다니며 겁을 주기도 한다. 

그의 집 가까이 이사해 간'나'가 보기좋게 그의 이런 술수에 걸려들었다. 그와의 악연은 이사하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서는 불안한 몸 상태가 안심찮아 극구 만류하는 아저씨와 거친 말싸움을 벌인 것이 단초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관한 이모저모를 알게 되고 주위 사람으로부터 경계를 듣기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외팔이의 마음을 정복해보고 싶은 야릇한 충동'에 이끌려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외팔이에 대한 그의 호의는 번번이 배반당하고 만다. 중학생의 자전거를 빼앗아 타다 고장을 내놓고는 수리비를 대신 내주겠다는 나를 속여 차액을 가로채는가 하면, 홑몸의 처지를 비관하는 체하여 창녀촌 화대를 뜯어내고, 걸리지도 않은 성병을 걱정하는 체하여 검사비를 울궈내기도 한다. 그들은 불행으루 몸단장을 하구는 동정을 유혹하지요.

불행으루 거미줄을 치구는 동정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구 있어요. 순진하거나 어리숙한 사람이 걸려들었어요. 이웃 사람 '기선'이 들려주던 말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계속한다. '끝까지 선의로 대해주는 데야 외팔이인들 굳어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자신의 노력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은 아끼던 탁상시계를 잃어버린 뒤였다. 집으로 불러들여 '형님' '아우'해가며 술을 마신 날의 일이었다.
외팔이의 교활성은 그가 살아가며 자기를 주장하는 표현인 것을, 그것을 어떻게 해보겠다던 내가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그날 비로소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한 차례 더, 외팔이와 한통속인 깡패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난 뒤에야 '유희'는 끝이 났다.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후보들의 공약 대결이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그런데 국민들이 감동하고 반길 만한 참신한 공약은 좀체로 보이질 않는다. 
대통령의 공약이란 최소한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것이라야 할 것이지만 오히려,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공약들만 쏟아내놓는 모양새다. 
복지공약이 그렇다. 지지율에서 단연 앞서가는 두 정당의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선심성 복지 공약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튀는 여당 후보의 복지 공약은 당내에서조차 마찰이 일 정도이고, 제1야당의 후보는 그에 질세라 경쟁적으로 복지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나중에야 어찌되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식의 공약에, 드러내놓고 반대할 수도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맞장구치는 식의 공약이 선거전을 혼탁하게 한다. 
이대로라면 누가 되든 선거 뒤의 국정 운영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 뻔하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복지는 필요하고 필수불가결한 국정의 주요 과제다. 
그러나 과도하고 무분별한 복지는 주고 받는 '유희' 자체를 끝장내고 말 것이다. 
원유 매장량 세계 1위인 베네주엘라의 몰락이 산 교훈이다. 
과도한 복지 정책의 역기능 현상은 우리사회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정부 지원금으로 인한 노동과 고용 시장의 왜곡 현상이 민요가 되어 구전되고 있는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원금을 둘러싼 편법과 불법, 지원금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노동 기피 현상 등은 크게 걱정해야 할 불길한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전해 오는 속담에 '가난은 나랏님도 못 막는다.'는 말이 있다. 
위 작품 속 주인공처럼, 가난을 면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사람, 인간적 삶의 가치 기준이 애당초 그릇된 사람을 도대체 무슨 수로 다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의 가난이야 말로 나랏님도 막을 수 없는 가난 아니겠는가. 

이들에 대한 맹목적 호의나 지원은 그들의 기대심리만 부풀리고 갈수록 교활하게 할 뿐이다. '한 표'에 눈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사탕발림이 자칫 국가의 미래를 거덜낼 수 있다.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닌다는 그리스나 아르헨티나 등의 비극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라가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라에 아무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유희의 끝장이 오기 전에 무책임한 지원금 유희를 끝내야 한다.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