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종일심춘불견춘終日尋春不見春 / 망혜답파령두운芒鞋踏破領頭雲 / 귀래우파매화취歸來偶把梅花臭 / 춘재지상기십분春在枝上己十分 - 중국 송대 성명 미상의 비구니 ‘오도시吾道詩’

유채꽃,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새봄의 전령들은 잎보다 꽃을 앞세웁니다. 삭풍과 폭설의 전쟁터에서 동장군이 패퇴한 전황을 재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생과 부활을 무기로 승리했으니 삼라만상들이여 축포를 쏘아라! 24절기의 마지막 대한을 끝으로 더 이상의 전투는 없다. 여기 승전의 새뜻한 꽃대를 드높이니 개선행진가를 목청껏 불러라! 신춘이 이렇게 사람들 사는 강토와 그대의 심전心田- 마음 밭에 마침내 당도했노라!

사람이 몸과 마음 부리며 사는 이치는 세세연년 똑같을 것입니다. 물환성이物換星移- 당나라 왕발(647-674)의 시구처럼 “못에 드리운 구름 여유로운데 / 만물은 변화하고 별자리도 옮겨진다” 그렇게 무수히 세월이 흘러도 말입니다. 2월 3일- 내일이 입춘이니 1천여 년 전의 이즈음, 송나라의 어느 비구니도 ‘봄’을 만나러 절집을 나선 모양입니다. 온종일 들길을 헤매어도 만날 수 없어, 이번에는 짚신이 닳도록 구름 위의 높은 산마루에 올랐습니다.

자고로 달의 뒤태를 본 이가 없듯이 진정 ‘봄’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가없이 넓거나, 좁은 하늘과 마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깜냥껏 고개 쳐들고 본 그만큼을 하늘이라, 품고 먹은 그 너비를 마음이라 여기며 살아갈 뿐입니다. 한겨울 내내 마음에 그리고, 새긴 봄을 상면하지 못한 채 귀갓길을 서두른 여승- 사하촌寺下村 어귀에 이르자 문득 한 줄기 매화 향기가 코끝을 스쳤습니다. 황벽선사의 ‘박비향撲鼻香’ 그 내음 좇아보니 한 보살할미네 돌담 너머의 매화나무에 몇 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함초롬히. 일초직입여래지- 은산철벽을 종당에 무너뜨리고 내디뎌 불토에 이른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게 동서양이 다르지 않을 터. 이쯤이면 191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기에의 모리스 메테를링크(1862-1949)의「파랑새」가 떠오르시겠지요. 그는 1906년 6막 12장의 아동극을 발표했는데 졸가리는 이렇습니다. 틸틸과 미틸에게 늙은 요정이 찾아와, 아픈 아이에게 용기를 줄 파랑새를 찾아주길 부탁합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모자를 쓴 남매는 온갖 동물이나 사물들의 영혼도 보고, 과거와 현재의 왕국을 오가며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새를 찾지 못하고 아침을 맞은 남매. 결국 둘은 집안의 새장에 기르던 비둘기가 바로 파랑새임을 알게 됩니다. 기쁜 마음에 조롱을 열고 잡으려 들자 그 새는 날아가 버립니다... 사벌등안捨筏登岸 득어망전得魚忘筌: 물가에 오르면 뗏목를 버리고, 물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잊으라- 파랑새와 매화가 곧 뗏목이자 그물일 것입니다.

도대체 사물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사물의 무엇을 어떻게 안다는 것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꽃이나 달, 혹은 더 일반적으로 모든 존재자를 보편자화 하지 않은 것이고, 보편적 즉 개념적 인식의 차원으로 옮기지 않고 그것을 진정 즉 물적인 자체성에서 포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기에서 사물이란 살아 있는 현실에 실재하는 구체적인 존재자, 즉 개체가 아니면 안 된다. 메를리 퐁티(1908-1961) 식으로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 있는 이 ‘객체화되기 전의 개체’, 즉 의식의 대상으로 객체화시켜 인식주체의 면전에 끌려오기 전의 원초적 실재성에서의 개개 사물이다. 그러한 개개 사물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결국 그 개개의 사물의 언어적 의미 이전의 독자적.실재적 의미의 핵심을 단번에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즈쓰 도시히코井茼俊彦,『의식과 본질』제2장 개체적.구체적 실존, 보편적.추상적 본질

사람이나 일 무엇이든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여기며 살아낸다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순을 넘기자 때때로 조급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코로나 19의 장기화에 서콕: 서재에서 콕 박혀 지내는 그 나달이 길어진 탓일까요. 손과 발, 눈 그 길이 막혀 꿈길 같은 봄이 아득, 허전해졌습니다. 해서 1월의 마지막 토요일, 30일에 남녘의 통도사로 원행했습니다. 자발적 유배지인 충북 영동이 소백산맥의 내륙이라 경부고속도로를 3시간 남짓 달려서 영축산의 양산에 이르렀습니다. 자장율사 기리며, 한반도의 온갖 매실나무 중에 가장 먼저 꽃 피우는 홍매의 절집 통도사.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地僧院-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불지종가 국지대찰답게 경내는 정갈했고, 사부대중은 절대 묵언의 증표인 양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일주문과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면서 머리속에 ‘매화꽃’이 만발했지만 의당 대웅전부터 참배했습니다. 적멸보궁은 불상 대신 벽창 너머로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 불사리탑이 보이는 구조입니다... 산령각과 삼성각, 관음전을 거쳐 내려와 이윽고 저만치 핀 자장매를 발견했습니다.

아뿔사! 모든 꽃이 그렇지만 봄꽃은 망울이 더욱 대견하고, 볼만한데 이미 피었다가 이울고 있었습니다. 360여 년의 수령 그 의연한 가지에서 시부적시부적 날리는 연분홍빛 꽃잎들- 그 낙화 현장에는 숱한 이들이 들꾀어 사진을 찍고 있었지요. 저 1천 5백여 년을 거슬러 자장율사慈藏律士가 창건하던 646년 당시에도 야단법석이었을 것입니다. 시방삼세- 동서남북 사방을 한 차례 더 나눈 것을 십방,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합쳐 삼세라고 각각 부릅니다. 그 불국에서는 오직 불타佛陀 한 분만이 여여생생如如生生하시고, 만물은 생주이멸, 대중은 생로병사 합니다. 세수 35살이던 고대 인도의 네팔 카필라국의 왕자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쳐 석가부처가 되셨습니다. 그후 80세 음력 2월 15일 유언을 남기고, 적멸했습니다.

여러 제자들이여!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없어지는 때가 있다. 태어남이 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오직 법法만이 영원히 변함이 없다... 나는 지금 육체를 떠나 삼계三界의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자등명自燈明: 그대들 자신을 밝은 등불로 삼고, 법등명法燈明: 부처님의 법과 계율을 밝은 등불로 하여 부지런히 게으름 피지 말고, 해탈을 구하여라.

“보리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오로지 부처의 법과 계율을 전하기 위한 노정인데 그 법맥은 달마를 조종으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580-651),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도도하게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자장율사(590-658)는 바로 4조에게서 법문을 전수받고,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안고 귀국해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한 것입니다. 아시기성불我是己成佛, 여시당성불汝是當成佛- 자장선사가 전하는 그 법어는 민초 백성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주었을 터. “나는 이미 깨친 부처요, 중생 그대들은 마땅히 깨칠 부처이니라!”

저는 오래전부터 ‘춘하추동’이라 쓰고 ‘볼열갈결’로 새겨왔습니다. 한자는 물론 순우리말을 곱씹어 보면 불이문不二門- 두 개가 아닌 하나의 ‘문’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노자『도덕경』제1장 “무명無名 천지지시天地之始, 유명有名 만물지모萬物之母: 이름 없는 천지에, 이름 얻고 시작하는” 그 한뉘가 꼭 한 번이듯이요. 무엇보다 갑골문 ‘봄 춘春’은 ‘해 일日’, ‘풀 초艹艹’, ‘진칠 둔屯’ 자가 함께 그려졌습니다. 그러니까 따스한 봄 햇살을 받고 언덕에서 움트는 초목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견주어 토박이말 ‘봄’은 본딧말 ‘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고, ‘볼’은 미래진행형이지요. 묶어보면 새봄은 “새롭게 사람과 사물을 보는 일”을 하는 그런 철이라고 새겨집니다.

한쪽 곧 공자의 유가는 본질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다른 한쪽 곧 노.장자의 도가는 본질 따위는 실재하지 않으며 존재는 혼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질을 사이에 두고 긍정적과 부정적, 우와 좌로 나누어 대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표층의식의 존재관과 심층의식의 존재관의 대치인 것이다. 즉, 일상적.경험적 의식에 나타나는 존재 풍경과 비일상적.관조적 의식 체험으로서 나타나는 존재 풍경이 유본질.무본질이라는 형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즈쓰 도시히코,『의식과 본질』제12장 이데이론.정명론.보편 본질 실재론

서양의 현자 자크 데리다(1930-2004)가 인정한 석학 이즈쓰 도시히코- 저는 그의 역작을 통해서 많은 통찰을 얻고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면 가치관 인생관도 달라지는 법이지요. 아무런 의심 없이 진리라 여기는 지금, 여기의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 이불해해지以不解解之: 풀리지 않는 것으로써 어려운 것을 푼다... 거듭 재삼 읽거나 쓰고, 궁리하고 좌망하다 보니 무릎을 치는 날이 있기도 하더군요. 봄철 겨우내 재계, 응축한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맺고, 터지듯 말입니다.

아직도 빛을 발하지 못한 수많은 아침놀들이 있다.

저는 살아생전 62번째의 새봄에 짜장 새롭게 보는 길이 열리길 갈망합니다. 저 니체가 즐겨 인용한 인도의 오랜 비문이 말하듯 과연 어디에서 새로운 아침을, 여태 발견하지 못한 부드러운 저 붉은 빛이 퍼지며, 그 빛과 함께 다시 하나의, 새로운 날들의 대낮 그 위대한 정오를 맞을 것인가? 해마다 이즈음이면 톺아 읊어보는 김수영(1921-1968) 시인의 1946년 데뷔작을 선물하면서 ‘밑줄 이야기’를 매조지 할까 합니다. 부디, 모쪼록 툭 터진, 큰 눈길로 새롭게 보시는 새봄 맞으시길 비손합니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 너는 줄넘기 작란을 한다. //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 그것은 작전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孔子의 生活難」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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