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2020년 경자년의 한가위- 코로나 19의 장기화 속에 역대 최장 54일의 장마와 슈퍼급 태풍이 엎치고 덮쳤지만 추석이 바투 다가왔다. 사네 못사네, 울고불고해도 해와 달, 별은 변함없이 뜨고 지는 법. 지구는 스스로 돌아 밤낮의 하루를, 해를 크게 선회해 1년을 만든다. 물론 달이 대괴를 한 번 돌면 1달이다. 여기에서 한 철에 6개씩 보름마다 드는 ‘24절기’는 양력이다. 그리고 달의 운행이 중심인 음력에 여러 ‘명절’이 깃든다. 묶어보면 태양을 중심으로 일하다가 달의 그날이면 일손을 놓고 쉬는 것이다. 

너도 나도 /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 우리의 삶이 /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 좀 더 환해지기를 /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 좀 더 둥글어지기를 /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 하늘보다 내 마음에 /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 이해인(1945- )「달빛 기도- 한가위에」전문

명절은 한자 뜻 그대로 ‘이름名이 있는 마디節’다. 나날이 죄다 비슷한 것 같지만 예로부터 각별한 음력의 그 날을 명절이라고 불렀다. 설, 대보름, 삼짇날, 유두, 칠석, 백중, 한가위, 구양절... 하늘의 수이자 양수인 1, 3, 5, 7, 9가 겹치는 중일重日과 달의 초하루와 보름 그 삭망朔望의 명일들. 땅이 물산의 중심이었을 때 세시풍속으로 이어온 전통적인 날들인 것이다.  이제 구시대적 유산으로 퇴색했지만 몇몇 명절은 면면히 쇠고 있다. 이렇게 보면 명절의 진정한 의미는 ‘제철을 따르며, 철철이 생것과 날것의 식재료 음식을 해 먹고, 감사하며 쉬는 날’이다. 둥근 만월의 한가위는 한민족이 지켜온 그런 명절의 절정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다. 그는 달을 “인류의 가장 오래된 TV”라고 명명하고, 1963년 ‘음악의 전시- 전자TV’에서 새로운 미디어인 그것을 예술적 소재로 체현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69년 7월 21일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다. 고요의 바다- 백남준이 진정한 스승으로 여긴 존 케이지(1912-1992)가 1954년에 발표한 ‘4분 33초’- 그 연주자 없는 침묵을 확인하는 지점이었다. 케이지는 ‘음을 음에 반환하라’며, 작곡된 음이 아닌 일상의 소음까지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사람들 저마다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예술적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대상에 투여된 자신의 모습 아니던가.     

하늘이 낳은 만물은 그 형체가 둥근 것이 많다. 사람과 금수가 지니고 있는 구멍, 사지의 마디, 초목의 가지, 나무그루와 꽃의 열매, 구름과 우레, 비와 이슬이 모두 그렇다. 달은 해가 둥근 것을 표준으로 삼고, 해는 하늘이 둥근 것을 표준으로 삼으며, 물은 달과 해와 하늘 세 가지를 표준으로 삼아 만물을 생장시키고, 만물은 달과 해와 하늘과 물 네 가지 둥근 것으로 표준을 삼으니, 둥근 것이 대부분이다. 물을 어찌 둥글다고 하느냐 하겠지만, 수은이나 물방울이 모두 둥글어 돌을 물에 던지면 물결이 마치 호랑이 눈처럼 굽이치게 된다. 사람과 금수의 눈동자도 물의 정수를 응결해 해와 달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장 둥근 것이다. - 이덕무『이목구심서 2』「세상은 둥글다」전문

부다익과 칭물평시: 천지 가득 찬 것은 덜어내 모자란 곳을 채워 음양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다(『주역』「지산겸괘 상전」) 그렇다. 차면 기우는 달의 변화 그 본령이다. 조선 유학의 전통적인 천지.우주관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고 네모졌는데 그 중심이 중국, 중화라는 소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다. 서양의 천동설과 유사한 것인데 이덕무의 친구 홍대용(1731-1783)은 지전설- 땅이 움직인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발상과 무한우주론을 내세웠다. 그로써 움직이는 둥근 땅에서 중국 당시의 청만이 세계의 중심 아니라 조선도 중심이 된다는 주창에 적극 동조했다. 이덕무가 ‘세상은 둥글다‘에서 전하고자 한 속내가 그것이다. 이제 그에게 서자 같은 신분적 굴레는 없으며 스스로 채워나가는 만월의 정신을 실행, 실천하는 길이 환히 열리게 되었다.

피붙이들의 웃음꽃 속에 태어나 울음바다로 떠나는 한뉘. 그 누구의 평생이든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역시 가장 모호한 사실은 머물던 곳에서 떠나는 길 위의 앞날이다. 생주이멸, 생로병사- 사람들이 내일의 어제인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까닭은 미래의 불투명, 불가지, 불확실성을 되도록 줄이기 위함이다. 아정 이덕무李德懋(1741-1792)는 서자 출신으로 일생을 두 칸의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자신을 독려해 당대 최고의 지성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 비록 초저녁 서편 하늘에 잠시 떴다가 이내 사라지는 초승달 같은 신분이었지만 종당에 만월 그 큰 보름달로 세상을 비추게 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게 전부가 아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 조선의 이덕무는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심전경작- 마음의 밭을 일구어 나가면서 종당에 출생적 차별이라는 독초를 죄다 뽑아버렸다. 추방된 굴원屈原, 도피한 두보杜甫, 궁정을 박찬 이백李白, 유배된 소동파蘇東坡, 단두대에 올랐던 도스토예프스키, 미국으로 망명한 나보코프.... 우리는 이들이 천형의 굴레를 어떻게 극복했고, 남긴 소출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통일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857- )의 2,417자「진감선사대공탑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도불원인夫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지 않고, 사람에게 다른 나라가 없다.” 그렇다. 석가를 모신 곳이 불국이고, 신성한 삼위일체를 받드는 공간이 성소가 되듯 인간은 심중에 터전을 잡고, 생을 꾸려가는 자주 국가로 그 외는 모두 다른 나라다. 자신의 몸과 마음 부리며 절대 불안, 부조리의 고독을 이겨내는 유일한 피조물이 사람이다. 러시아의 탁월한 철학자 베르댜예프는『인간의 운명』에서 “인간은 고통을 참아 낼 수 있지만 무의미한 고통은 참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다시 이덕무로 돌아가자. 정조 이산은 그가 운명하자 “이덕무의 글은 우아하고 훌륭하다. 그의 재주와 식견을 잊을 수 없다.” 회고하고, 국가 차원에서『아정유고』를 간행토록 명했다. 사실 동방일사는 살아생전 중국의 시문을 본받지 않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박지원은 “『시경』3백 편의 새와 짐승, 나무와 풀, 민간의 이야기는 중국의 풍속이다. 만약 공자 같은 성인이 다시 나타나 여러 나라의 풍속을 관찰한다면 마땅히 조선에서는 이덕무의 글을 살펴볼 것이다.” 옹호하고, ‘조선의 국풍’으로 치켜세웠다. 이로써 조선의 사람과 자연, 사물을 ‘온몸으로 밀고 쓴’ 형암의 시문은 시공을 넘어 무궁한 존재로 타오르게 되었다. 저『장자』제2「양생주」의 경구 13자가 구현된 것이리라. “지궁어위신指窮於爲薪 화전야火傳也 부지기진야不知其盡也: 손가락이 장작 지피는 일을 다하면 불은 계속 타고 꺼질 줄 모른다!”

일찍이『주역 비괘』의 단사彖辭에 “무늬가 밝아서 머무니 사람의 무늬다.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하게 한다: 人文以化”고 규정했다. 천리의 절문節文이 드러나고 예의와 법도가 빛나는 것 모두 인문 그 문양이 단정하기 때문이다. 문양은 과학적 수의 패턴을 발견하는 일인데 동양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기인한다. 서양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비롯되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올 수 없다!” 기하학이란 뜻의 ‘게오메트리아geometria’는 토지 ‘게ge’와 측정 ‘메트레인metrein’이 합성된 단어다. 

고대 이집트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토지를 측정하기 위한 수리가 발달했고,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를 변형시켰다. 경험적인 사실을 뛰어넘어 머릿속 추론을 통해 계산하는 능력을 바로 이성과 결부시킨 것이다. 뒷날 과학적 사유를 주도했던 갈릴레이가 중세를 벗어나며 이 언술로 갈음했다. “자연의 커다란 책은 그 책에 씌여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 그 언어는 수학이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강은 바로 저들과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열하일기』「도강록 서」)

도대체 ‘사이’란 무엇인가? 하늘과 땅 사이를 나는 새를 지칭하는 것인가. 땅을 딛고, 하늘 이고 사는 사람들도 그 사이를 오가니 새이런가. 그저 신소리만은 아니다. 가장 먼 땅과 하늘의 천지처럼 이분법적 기하학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수학적 선을 직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이가 진정 얼마나 멀고 먼 것인지... 여기에서 그 직선적 이항의 대립을 나열해 보자. 영혼과 육체, 실체와 현상, 가지계와 가시계, 형식과 내용, 성과 속, 유목민과 정착민, 연대기와 기상학, 존재와 무... 이 두 사이가 바로 새다. 어느 한쪽만 고집하면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 없이는 그 어떤 문양도 새길 수가 없다. 균열은 차이, 틈새를 낳고 다시 무언가를 생성하기 마련이다. 조선 이덕무의 만월은 한가득 찬 그 무엇 이를테면 이데아 같은 것이었지만 어딘가, 무언가 빈 곳을 찾고 메꾸는 보름달을 늘 지향하는 삶을 추구했다. 해서 이렇게 늘 다짐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늘 새롭고 다시 새로울 뿐이다. 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삼 일’,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유념한다.  - 이덕무「고금과 삼 일」부분

몸과 마음 부리며 늘 만월, 보름달 지향하며 새날을 살아내 맞은 추석명절- 비록 올해는 코로나 19로 풍속이 달라지겠지만 일가친척과 이웃, 지인들과 속정 나누시는 한가위 보내시길 비손합니다, 햇살 못 미치는 이녁의 가슴속 그 내면의 보름달 바라보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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