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회 전 가톨릭대 부총장
김석회 전 가톨릭대 부총장

우환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암흑천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인류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미증유의 재앙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재앙이 쉽사리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기에, 우리들은 별의별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은 이들 재앙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업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인간의 업보란 우리들 인간이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죄과라고 생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문명의 발달과 함께 찾아온 지구촌의 환경파괴는 온갖 동식물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그간 우리 주위에 있었던 생물체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옛날 자주 볼 수 있었고 우리들의 추억 속에 잠재해 있는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인간사회의 모든 것을 동물의 이미지로 재미있게 풍자하고 인생의 지혜를 묘파한 이솝 우화집은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을 오히려 인간의 미덕,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옛날 어렸을 적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숱한 여우들을 보고 또 그들과 함께 살았던 기억이 머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원수 같은 여우들이었지만 날이면 날마다 여우를 만나는 게 일상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충남 광천읍 오서산 끝자락에 둘러싸인 외딴집에서 살았던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불청객인 여우들과 신경질적인 싸움을 하며 살았다. 여우는 밤이면 밤마다 우리 집 닭장에 가둔 닭을 잡아가려고 닭장 주위를 맴도는가 하면, 닭장을 뚫고 들어가 닭을 잡아가기도 하는 게 일상적이었다. 그럴 때면 닭장은 아수라장이 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린 아버지는 발만 동동 구를 뿐 여우를 쫓기 위해서 밖에 나가시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식구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한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는 아버지도 어머니를 따라서 같이 여우를 쫓아내는 데 동참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여우와 싸우다시피 하신 것은 어머니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머니 걱정을 하게 되고 그로써 어머니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갖게 되었다. 여자는 강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더욱 강했다. 그랬던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가신 지 오래되어 몹시 보고 싶고 그립기만 하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서 마당에 나가보니 여우가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아닌가. 그래서 막대기를 들고 여우를 쫓아가 여우를 내쫓은 적이 있다. 그날은 내가 여우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열두어 살 때 일이니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며칠 지나서 동생과 함께 새벽에 마당에 나가보니 또 여우가 마당을 휘젓고 다니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날은 동생과 함께 달아나는 여우를 뒤쫓아가게 되었다. 뒷산이 약간 높았던지라 우리 둘은 헐레벌떡거리며 여우의 뒤를 쫓아 가는데 여우는 달아나다가 10여 미터 떨어지면 되돌아서서 우리들을 빤히 쳐다보곤 하는 것이다.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 보니 어느덧 산 정상 가까이에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그렇틋 힐끗힐끗 뒤돌아보며 달아나는 여우야말로 교활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흔히들 교활한 사람을 일컬어 여우 같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우리 형제들은 드디어 달아나는 여우를 쫓아 산 정상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동생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혼비백산 동생의 손을 잡은 채 집으로 내달린 기억이 난다. 동생이 왜 쓰러졌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알 길이 없다. 냉수 한 그릇을 먹이고 나니 동생은 무사해졌지만, 그날 여우와의 싸움은 내가 완패하고 만 셈이 되었다. 나와 여우 간 싸움의 승부는 일대일로 끝났지만, 그 당시로써는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내 머릿속에는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는 얘기가 떠올랐고 그랬기에 나는 더욱 기겁해서 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쳤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뒤로부터는 여우를 겁내게 되고 그로써 여우와의 싸움도 삼가기로 하였다.

여우에 얽힌 또 다른 얘기가 있는데, 그것은 동네에 사는 아저씨가 그 당시 청양에 있는 구봉광산으로 일하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에 출근하는데 여우 한 마리가 아저씨의 앞길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것을 보았단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그 아저씨는 광산에서 사고가 나서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그 얼마나 끔찍하고 불길한 징조인가? 여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떻든 기분 나쁘고 무서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든 지금도 젊은 처자가 내 앞길을 가로질러 지나가면 그날은 기분이 언짢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많은 여우들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는 여우들이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그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지만 그 이유를 알아낼 길이 없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면 그것은 쥐약이 널리 보급되어 여우들이 죽은 쥐를 먹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뿐 이다.

이처럼 그 어릴 적 여우들과의 인연이 있었던 나로서는 주위에서 여우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허전함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TV에서 여우가 나오면 그 프로를 끝까지 보며 그 옛날에 있었던 여우들과의 추억어린 상상 속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우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향수에 젖기도 한다.

그런데 다행히도 소백산에 여우 여러 마리를 방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앞으로 언젠가는 그 옛날에 만났던 여우들의 후예들을 단양 집 뒷산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의 기대도 해본다. 그래서 그 옛날 고향에서 겪을 수 있었던 여우들과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 보기도 한다.

어쩌면 창조주는 여우도 우리 생태계의 한 존재로서 인정을 했을 것이겠기에, 우리는 여우들도 우리 인간들의 동반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서 그 옛날 내가 겪을 수 있었던 추억어린 얘기들을 다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신 여우가 우리 주위를 맴돌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스런 일일는지. 오늘은 이 허망한 꿈을 꾸며, 그 옛날에 볼 수 있었던 여우를 우리들의 한 식구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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