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여행 안내서들은 침략이나 전염병처럼 지구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다양한 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버렸다. 나도 또한 한때, 젊은 날의 무지함 탓에 어떤 장소들을 묘사하겠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훗날 내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았을 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 강렬했던 존재감을 되살리려 애쓰고 그 글의 소곤거림에 귀를 기울여 보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진실은 가혹했다.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은 파괴한다는 의미였다. -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1962- ) 장편소설『방랑자들』「여행 안내서」

대전과 대구, 안동과 청송- 손금이 선험적 추론의 대상이라면 발의 금은 경험적 실험의 그것이다. 사람은 유전과 환경처럼 어떤 등가성의 범주에서 살아간다. 관념론과 유물론, 존재와 무 같은 철학적 주제는 물론 웃음과 눈물, 나무와 길 따위가 단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1982년 3월 11일 이래로 나의 발바닥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선 하나가 패였다. 바로 경북의 내륙 청송군 진보면에서 군대 생활을 한 덕분이다. 5번국도의 버스와 경부선 기차로 본가를 오가던 의무적 유배의 길- 그 ‘동선’은 제대 이후에도 지리적, 심리적으로 지속적인 여행의 루트로 새겨졌다.

소백산맥의 중산간 충북 영동으로 귀향한 지 6년- 환갑이 넘은 자발적 귀양지에서 때때로 지금, 여기를 떠나 그때, 거기를 회억한다. 이제 올가 토카르추크의 언술처럼 ‘강렬한 존재감’ 그 젊은 날의 열정은 파괴되고, 냉정한 반성과 성찰이 깊어져 간다. 그런데 2020년 3월 3일 현재 ‘코로나 19‘ 감염증의 확진 4,812명, 검사 진행 35,555명, 사망 29명’이라는 보도가 나의 ‘최후의 보루’마저 함락시키고 말았다. 감염 예방을 위한 대국민 행동수칙을 비롯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한국사회- 다시 언제쯤 자유롭게 ‘대구와 경북’ 그 길을 밟을 수 있을까? 손금은 환하게 그대로인데 섣부르게 발길을 낼 수 없는 나날이다.

전쟁과 빈곤, 질병은 인간이 짊어진 세 가지 원죄라는 말이 있다. 종종 이 범주는 동시에 발생하기도 해 더 큰 불행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나의 문명, 하나의 사회는 그 자체의 나쁜 역병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나쁜 역병은 그 문명의 변혁, 그 사회의 총체적 개혁에 의해서만 격퇴할 수 있다.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유럽에서 시대에 따라 유행한 역병을 대충 꼽아보면, 13세기의 나병, 14세기의 페스트, 16세기의 매독, 17-8세기의 두창과 발진티푸스, 19세기의 콜레라와 결핵, 20세기 초의 인플루엔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 황상익(1998)『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제1장 질병의 기원과 역사

사실 특정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주로 불행과 고통의 흔적이 더 많이 전해진다. 역사는 물론 문학을 비롯한 제7의 예술까지 모두는 그 상실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가 어둡고 혼란스러울수록 아름다운 미래의 삶에 대한 열망은 더욱 큰 법- 어찌 보면 희생자들은 영국의 사회학자 R.윌리엄스의 『긴 혁명THE LONG REVOLUTION』그 정치와 경제, 문화 혁명의 제물인지도 모른다. 후손들에게 결코 불행을 재연하지 말 것이며,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당부의 표석에 새겨지면서 말이다.

시장은 축제같이 찬란한 빛이 출렁거리고 시끄러운 소리가 기쁜 음악이 되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동화의 나라로 데리고 가는 페르시아의 시장- 그곳이 아니라도 어느 나라, 어느 곳, 어느 때, 시장이면 다 그런 음악은 있다. 그 즐거운 리듬과 멜로디가, 그곳에서는 모두 웃는다. 더러는 싸움이 벌어지지만 장을 거두어버리면 붉은 불빛이 내려앉은 목로점에서 화해 술을 마시느라고 떠들썩, 술상을 두들기며 흥겨워하고, 대천지 원수가 되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오다가다 만난 정이 두터워지는 뜨내기 장사치들. 온갖 인생, 넘쳐흐르는 변함없는 생활이 이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 박경리 장편소설 『시장과 전장』제9장 페르시아의 시장

1950년 한국전쟁 중에도 꽃은 피었고, 아이들은 태어났으며, 시장은 열렸었다. 그런 삶에 대한 갈망이 6-70년대 ‘잘 살아 보세’ 시대를 거쳐, ‘말 좀 하자’는 8-90년대 민주화를 이루고, ‘잘 놀아 보세’의 웰빙과 소확행을 구가하는 21세기를 열었다. 이제 ‘BTS’나 ‘기생충’이 대변하듯 한민족이 세계문화의 주류 대열에 합류할 즈음에 ‘코로나 19’가 엄습했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다.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 불린다. - 한병철(2010)『피로사회』「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독일 베를린대학의 철학과 한병철교수의『피로사회』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러면서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21세기의 시작은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주창했다. 전쟁과 민족적 분단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떠안았던 독일은 ‘성과사회’로 진입했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초입에서 번번이 좌절을 겪고 있다. 한편 한교수의 ‘깊은 심심함’은 우리를 되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한 근터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 한병철(2010)『피로사회』「깊은 심심함」

깊은 심심함- 그럴 때마다 나는『장자』를 찾는다. 장주의 경구보다 그의 친구 혜시의 ‘역물십사歷物十事’(잡편 ‘천하’)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중 7번째가 ”금일적월이석래今日適越而昔來: 오늘 월나라로 떠났다고 해도 어제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다. 그렇다. 기억하고, 부르고, 곱씹지 않는 과거는 언제나 반복된다. 장자와 발터 벤야민의 ‘꿈’은 모두의 아름다운 미래로 날게 하는 ‘나비와 새’의 둥지다. 올가 토가르추카는「선, 면, 구체」에서 자신의 꿈을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종종 남이 나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뭔가를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꿈꾸었다. ...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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