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호 변호사(전 법무연수원장, 전 대전지·고검장) / 뉴스티앤티

월요편지 애독자인 어느 친구가 지난 5월 15일 자 [헛된 꿈을 좇은 5년 7개월이 가르쳐 준 것]이라는 편지에 대해 최근 몇 년간의 월요편지 중 최고라는 찬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월요편지를 보면 조 대표가 항상 무엇무엇을 하였다거나, 독자들에게 어떤 어떤 것들을 해보라고 권하는 내용인데 이번 월요편지는 실패한 일을 진솔하게 담고 있어 더 공감이 갔어요."

그의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월요편지를 통해 제가 한 일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혹시 그에 공감이 가면 한번 해보기를 권하는 마음에서 월요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논리적 근거로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한 말을 가끔 인용하곤 했지요.

"책을 쓴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다. 독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함도 아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통해 자기를 극복했다는 일종의 증거다. 낡은 자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인간으로 탈피했다는 증거다. 나아가 같은 인간으로서 자기 극복을 이룬 본보기를 제시함으로써 누군가를 격려하고자 함이요, 겸허히 독자의 인생에 보탬이 되려는 봉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격려]가 혹시 독자에게 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든 것입니다. 사실 저는 무슨 일을 겪거나 무엇을 알게 되면 누군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이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이 나는 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칠판에 쓰면서 하는 버릇은 대검찰청 혁신추진단장을 할 때부터였습니다. 혁신에 대해 할 말이 많던 저로서는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무실에 칠판을 놓고 필요할 때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것이 습관으로 굳은 것입니다.

이런 습관 때문에 집과 사무실의 많은 벽면을 칠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집에서도 가족들과 이야기하다가 좀 답답하면 칠판에 글을 써가며 이야기를 합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칠판에 글을 쓰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그 정리된 내용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가족들은 이런 저의 모습을 환영하지만은 않습니다. 제가 칠판 앞에 서면 또 강의가 시작되었다는 반응입니다. 아내는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이야기는 내용은 좋은데 좀 짧게 하세요." 혼자 열심히 칠판에 무엇인가를 쓰며 떠들고 있으면 먼저 딸아이가 사라지고 아내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등 딴전을 피웁니다. 그래도 가장 충실한 수강생은 지적 호기심이 많은 아들 녀석입니다.

그런데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월요편지 독자들도 제 아내나 딸아이 같은 입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친구가 이런 의도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문득 월요편지가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월요편지를 읽은 분들이 저를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십니다. "조 대표는 나보다 인생을 50%는 더 많이 사는 것 같아.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하고 살아. 월요편지를 보고 있으면 그 열정이 부러울 때가 많아."

저는 이런 표현이 월요편지에 대한 덕담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되짚어 생각하면 월요편지가 독자의 삶에 [격려]가 되기보다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글쓰기가 편치 않아졌습니다. 아마도 지난주 편지가 하루 늦게 쓰인 것도 주제 자체가 가진 무거움도 있지만 저의 이런 심리 상태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월요편지를 계속 써야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 것입니다.

과연 저는 왜, 무엇을 위해 매주 힘들게 월요편지를 쓰고 있는 것일까와 독자들은 왜, 무엇 때문에 조근호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월요편지를 쓰면서 한 번도 독자를 의식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 마음대로 썼습니다. 처음부터 월요편지의 독자는 제 아내 한 사람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월요편지를 쓰고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코멘트를 해주면 그것만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도 저의 말하기 습관을 잘 아는지라 거의 코멘트를 하지 않고 그저 "좋아요"라는 반응으로 최초 독자의 임무를 다하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독자를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독자를 의식하면 글을 쓰기 어려워집니다. 제가 신문에 칼럼을 써보니 독자를 의식하게 되더군요. 한 열 번쯤은 퇴고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 칼럼 쓰기가 재미없었습니다. 민낯이 아니라 화장발 얼굴이니까요. 월요편지는 민낯일 수 있어서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를 의식하는 순간 퇴고하는 화장을 하여야 합니다.

저는 월요편지 독자분들에 대해 이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월요편지, 보고 싶은 분만 보세요. 그러나 보고 싶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월요편지 메일을 스팸 처리하세요. 저도 진솔하게 가식 없이 쓸 테니 그런 월요편지가 좋은 분만 독자가 되세요." 시건방진 생각이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독자를 의식하게 되고 그런 순간 제 글은 분 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지금까지 월요편지를 써 내려 가면서도 마음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독자를 의식하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본적으로 월요편지를 계속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오늘 이전까지는 글감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가슴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과정을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가슴속 불덩어리를 꺼내기 위해 글을 써요. 불덩어리가 밖으로 나오면 독자에게는 따뜻한 손난로, 위안이 되더라고요. 열정적으로 살면 불덩어리가 생깁니다. 그게 있는 한 계속 씁니다."

그런데 월요편지가 독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머리가 하얘지더니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부담]이라는 단어가 저의 상상력을 정지시켜 버린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일어나 월요편지로 무엇을 쓸까 고민하였습니다. 또 다른 실패담을 써서 독자에게 위안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가슴에 있는 불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불덩어리는 가슴에서 꺼내지 않으면 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살기 위해 불덩어리를 꺼낸 것입니다. 오늘의 불덩어리는 '월요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을 꺼내 글로 식히지 않으면 저는 이번 주 내내 그 불덩어리로 신음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제가 살아남기 위해 이 이야기를 월요편지 주제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덩어리를 가슴에서 꺼내 글로 쓰고 나니 가슴이 좀 후련해집니다. 월요편지를 더 쓸 것인지에 대한 해답도 찾았습니다.

결론은 "더 쓰렵니다."입니다.

지난 2월 22일 자 조선일보 인터뷰의 한 대목도 월요편지를 더 쓰겠다고 결심하는 데 힘이 되었습니다. "고검장까지 지냈지만 사실 대단치 않은 사람이에요. 실수하고 흔들리고 외로워하고 고민하는 것들을 털어놓습니다. 독자는 '나이 저 정도 먹고 고검장까지 했다는 사람도 저런 고민을 하고 저런 약점이 있구나' 생각하며 인생을 돌아볼 계기가 되겠죠. 그렇지만 사실 자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이 됐다는 일종의 증거를 남기기 위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자는 의식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상상력이 살아나 제 삶이 만들어 낸 열정의 불덩어리를 꺼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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