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가치관과 신념

1955년 6월 28일, 나는 마침내 육사 정규 5기생, 아니 15기생으로 입교했다. 내가 성적이 우수해서 합격한 것보다는 축구를 잘하니까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 선수로 뽑지 않았을까 싶다. 3차에서 보여준 체력검정 시험에서 플러스알파가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됐다.

막연한 애국심으로 육사를 지원했던 마음과 달리 실제로 육사에 들어와 지휘관으로서의 교육을 받게 되면서 나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마따나 “사람이 현명해지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따른다.”는 사실을 깨우친 터였다.

갱스터 영화의 고전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를 보면, 어릴 적 빈민가의 단짝 악동 로키와 제리가 등장한다. 20년 후 제리는 부랑아들을 선도하는 사제(司祭)로, 소년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로키는 암흑가의 보스로 전혀 다른 운명으로 만나게 된다. 어릴 적 함께 소매치기하다 걸려서 도망칠 때 붙잡히는 건 매번 로키였다. 발이 늦었다. 그런 로키는 끝내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두 사람의 인생을 가른 건 다름 아닌 뜀박질이었다. 로키처럼 나 또한 공부에 관한 뜀박질이 늦다는 걸 뼈저리게 깨우친 건 육사를 들어가서였다. 우등을 하고 1등을 위한 뜀박질이 아닌, 생도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했다. 나는 토요일 오후 외출을 마다했다. 다른 생도들이 외출을 나간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세 배는 노력해야만 된다는 신념을 가졌고 그 신념에 대한 결과는 아주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만하는 우등생보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열등생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남보다 몇 배 최선을 다한다는 잠재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 했던 자들의 성공 사례는 내 주변에 부지기수(不知其數)다.

육사의 학과 제도는 모든 생도들이 철저히 경쟁 대상이다. 테이어(Thayer) 제도라고도 불린 육사 교육 방식은 공병(工兵) 기술 교육 중심으로, 공병 장교였던 테이어가 1815년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닉(프랑스의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는 국립공대)에 유학 가서 배운 것을 미국 육사로 도입했다. 미국의 육사(웨스트포인트) 교육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교장이 된 뒤 스포츠의 중요성과 명예 제도를 추가했다. “생도는 거짓말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훔치지 않고, 그런 비리를 묵인하지 않는다.”는 명예 제도를 확립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재가로 1802년 설립된 웨스트포인트는 미국 최대의 공과대학이었다. 당연히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이 지휘한 미군의 공병단은 19세기 개척기에 미국의 도로나 철도 항만 등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육사 또한 이런 미국의 이공계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왔다. 물론 미국 육사의 시스템이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이기심과 협동심 부족이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보니까 그런 것들은 결국 군대라는 특수 조직에서 단지 단점으로만 간주할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 있어 그러한 시스템은 군인으로서 ‘임무수행’ 능력과 사생관 정립에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9년 5월 27일, 소위로 임관, 40일간 휴가를 다녀온 후 7월부터 6개월간 초등군사반 교육을 받았다. 보병 동기 100명 중에 2등을 했다. 반드시 우등을 하겠다는 목표를 둔 게 아니었다. 소대장과 중대장의 임무수행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자극했고 외출외박을 줄이고 임무수행에 필요한 학과에 매진한 결과였다. 전술학과 지휘통솔, 학술학에 치중했다.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 내가 임무수행이 아닌, 출세를 위해 우등하겠다는 생각으로만 달려들었다면 내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마음자리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토끼는 상대를 보지만 거북이는 목표만 본다. 걸음은 느리지만 시선은 목표를 향해 있다. 집중의 눈길이다. 그러니 발걸음, 시선, 목표가 한 방향으로 일치해 있다. 반면, 토끼의 시선은 주변의 경쟁자를 향해 있다. 앞으로 뛰긴 하는데 두리번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선과 발길이 어긋나 있다 보니 눈은 목표가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달랐다. 애초에 우등하겠다는 욕심이나 출세하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가져본 적이 없다. 시골 촌놈이 육사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 감사함과 지금 해야 할 일은 군인으로서 임무수행을 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여겼을 따름이다.

실제로 인류의 위대한 발전을 이끈 과학자 뉴턴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스티븐 호킹 박사 등은 입을 모아 “굳은 인내와 노력을 하지 않는 천재는 이 세상에서 있어본 일이 없다.”고 했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에게 열두 척의 배가 있었다면, 내겐 군인으로서 소대장과 중대장의 임무수행을 위한 지식 함양에 슬기와 지혜를 모아 끈질긴 노력이 있었을 뿐이다.

 

어려웠던 시절

지금처럼 당시에도 육사는 서울 출신 생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서울 생도들은 어느 누구도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할 수 없었다. 서울은 6·25 폭격으로 폐허화되었고 생활도 나보다 어려웠다. 나는 생도 휴가 때마다 동기생들을 시골집으로 데려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닭을 잡는다거나 소고기와 생선 등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만들어주셨다. 거기에 아버님은 두둑한 용돈까지 쥐어주셨다. 동기생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부여 백마강 뱃놀이를 하는 등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동기생 중 가정형편은 좋았고 상위에 속했다.

1959년 광산을 하시는 아버님 덕분으로 비록 내가 박봉의 월급이었지만 소신껏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군에서는 군 간부들이 박봉에 시달리며 먹을거리인 주(主)·부식(副食)을 빼돌리거나 산의 나무를 잘라 팔아먹는 비리가 적지 않았다. 젊은 장교들은 “썩어빠진 군 간부들이 군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개탄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기필코 나는 깨끗하고 정의로운 참다운 군인이 되겠노라’고. 그래서였을까, 초급장교 시절의 나는 이상하리만큼 보급투쟁을 많이 했다. 마치 병사들의 먹을거리를 지켜내야 하는 사명을 띠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생각하니 가난했던 우리 중대장 윤 대위와 대대장 안 중령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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