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하루는 작은 일생, 1년은 큰 한뉘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하루는 작은 일생, 1년은 큰 한뉘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8.12.28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는 곧 우리 존재의 부정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다. 명백한 진리인 탓에 그 어떤 이성적 위로도 발가벗겨지고 마는 황량한 삶의 지대가 ‘늙음’이다. 그 무엇도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늙어가며 우리는 세계가 사라지고 오로지 시간만 남은, 내면만 덩그러니 끌어안은 의미가 된다. - 장 아메리 (1912-1978)《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위로가 아닌 진실을’

성탄절과 연말연시 즈음이면 어김없이 방영되는 TV의 마술 프로그램. 모자 속에 구겨 넣은 종이가 비둘기로 변하고, 잘려진 스카프가 이어져 끊임없이 풀리고, 수갑과 온몸을 꽁꽁 묶은 밧줄을 풀어버리고, 사람을 공중에 띄우거나 절단시키고... 눈을 부라리고 지켜보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광경들. 이 마술의 사전적 정의는 ‘재빠른 손놀림이나 여러 가지 장치, 속임수 따위를 써서 불가사의한 일을 하여 보임’이다. 어른들이야 눈속임이라고 치부하지만 아이들은 마냥 빠져든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살인데 아직도 믿니?”라며 동심을 무참히 깨버렸다고 논란거리가 된 산타 할아버지. 짜장 나는 몇 살쯤 부모님이 산타인 줄 알았을까?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어느 해부터 머리맡에 선물이 없었다. ‘존재하지 않음’의 산타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훗날 자식들을 위해 루돌프를 몰았다. 내가 그 산타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낳은 아들이 아빠, 엄마의 딸이 어머니 되는 순환- 사람 그 한살이에 경외심과 경건함이 드는 연종연시이다.

인지발달론의 대가 피아제에 따르면 구체적 조작기인 7세부터 11세까지 기억력과 사고력이 현저히 발달한다. 출생에서 2세까지의 감각운동기나 전조작기에는 보존 개념이 없고, 직관적 사고에 의존한다. 그러니까 장롱과 방바닥의 틈새로 들어간 구슬은 영원히 없어진 것이고, 화장대나 식탁은 엄마의 등과 다르게 올라갈 대상이 아니다. 자신은 물론 타인들과 ‘이성적 위로’를 주고받으려면 적어도 7살이 넘어야 가능하다. 한편 루소는《에밀》에서 유아(1-5살), 아동(5-12살), 소년(12-15살), 청소년기(15-20살), 성년(20살-결혼)으로 구분하고, 12살이면 이미 ‘어른’이라고 기술했다.

철학은 개념이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몸은 현실이고 영혼은 개념이다. 영혼과 몸은 서로 맞아떨어지는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죽은 시체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참된 현실은 아니다. 시체는 개념이 없는 현실, 즉 무無개념의 현실일 뿐이다. 죽은 몸이 썩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 헤겔(1770-1831) 《역사철학강의》

삶을 영속하는 것은 장담할 수 없고 / 삶을 유지하기조차 항상 힘들고 서툴다 / 진실로 곤산과 화산에 노닐고 싶지만 / 아득히 그 길은 끊어져 있다 / 그대 몸과 만난 이래로 / 일찍이 슬픔과 기쁨을 달리한 적이 없었지 / 그늘에 쉴 때 잠시 떨어지는 듯했지만 / 햇빛에 머물면 내내 헤어지지 않는다 / 이렇게 함께 하는 것도 이미 한결같기 어려우니 / 서글프게 때를 같이하여 사라지리라 / 몸이 없어지고 이름 또한 사라질 텐데 / 이를 생각하면 온갖 감정이 들끓는다 / 선을 이루면 전해지는 인애를 남기리니 / 어찌 스스로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 술이 근심을 없앨 수 있다고 하지만 / 이것에 비하면 어찌 보잘것없지 않겠는가 – 도연명(365-427) ‘몸과 그림자의 정신’ 3수 중 제 2수 ‘그림자가 몸에게 대답함’ 전문

오류선생은 이 연작시를 짓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귀한 이나 천한 이,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 모두가 애쓰며 생에 연연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는 매우 미혹된 것이다. 그래서 몸과 그림자의 괴로움을 다 드러내고, 정신이 자연의 이치를 따져서 풀어 준 것을 말하노니, 관심 있는 군자들은 함께 그 뜻을 취할 것이다.” 아마도 헤겔이 살아생전 이 시를 감상했다면 ‘철학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바로 이것이다’ 라며 무릎을 쳤을 것이다.

장 아메리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죽고 나면 모든 게 무無일지라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 오로지 우리만의 문제일 따름이다‘ 라며 이 명백한 진리인 ’존재하지 않음‘을 위해 노년을 존엄하게 보내기를 권고한다. 본명이 한스 차임 마이어인 그는 26살에 조국 오스트리아를 등지고 벨기에로 갔다. 유대인 혈통인 마이어는 이름마저 아메리로 바꾸고 나치스에 저항해 싸웠다. 결국 밀고를 당한 청년은 프랑스 남부 수용소에 갇혔으나 탈출해 더욱 처절하게 지하투쟁을 하다가 다시 포로가 되었다. 이후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젤의 나치스 수용소를 전전하다 독일의 패망으로 풀려나 브뤼셀에 정착해 신문기자겸 작가로 살았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그 개인의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 세상을 떠올려 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없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할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인간 실존의 근본 상황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실존은 결정적 순간에 세계의 의미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의미는 참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모순이다. - 장 아메리《늙어감에 대하여》‘죽어가며 살아가기’

1978년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어느 한적한 호텔에 방을 잡은 그는 준비해온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순수하면서도 치열하게 자신의 생을 살아낸 한스 차임 마이어- 1966년에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한 《죄와 속죄의 저편》으로 관념론적 지식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1976년에는 《자유죽음》으로 대중들의 격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던 장 아메리- 그야말로 ‘저항과 체념의 모순을 탐색하는 여정’의 예순여섯 해를 살아냈고, 자진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연말연시, 연종연시, 송구영신, 근하신년, 공하신희... 이런 낱말들이 자주 들리는 철이다. 그렇다. 하루가 작은 일생이라면, 한 해는 좀 더 큰 일생이다. 자고 깨는 짧은 부활의 하루가 쌓여 1년이, 한 해가 이어져 평생이 된다. 하루를 한뉘처럼, 한뉘를 하루처럼 거듭난다면 노인은 그저 ‘오늘’을 사는 사람일 뿐이다.

기차의 역방향 좌석에 앉다 보면 사물과 시간을 마중하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환송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진다. 시간 세월 하지만 정작 내가 세월이고 시간이다. 이승에 온 것은 그 무엇이라도 죄다 가는 법. 오기만 하고 또한 가기만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가야 오고, 오면 가는 엄정한 선회가 우주정신의 이법이다. 올해 그러했듯이 새해에도 늘 오늘의 새날 반기며 건승, 건필하시길 비손합니다.

 


추천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