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의 저력을 믿는다

2023년 새해가 밝았다. 
검은 토끼의 해를 맞아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자'라든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남의 말을 잘 듣자'라든지 덕담들이 오간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뭐 하나 밝은 면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는 다시 기승을 부리고, 천정부지로 뛴 금리에 속앓이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주머니는 얇아졌는데 전기료, 교통비 등 모든 물가가 들썩인다. 미사일과 무인기 등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남북관계는 더 나빠졌다. 

여야 정치권은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조차 진영 논리에 따라 극단으로 나뉘어 사사건건 부딪친다. 마치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희망(希望)이 없다고들 한다. 

아니다.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이다. 희망이 없다니.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절망(絶望)이란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희망의 끈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과대평가도 문제지만 스스로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현대사만 놓고 보자. 전쟁만큼 절망적일 때가 있었는가. 한국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고, 온 국토가 잿더미가 됐다.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아 겨우 연명하던 때야말로 절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살아남아 불과 반세기 만에 다른 나라를 원조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부러워하던 우리가 그보다 더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일본의 문화를 베끼다가 이제는 일본이 우리의 문화를 베끼고 있다. 
아무리 지금이 어렵다 해도 전쟁 때보다 어렵진 않다. 누가 지금 절망을 이야기하는가.

희망과 절망을 이야기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127시간'이라는 미국 영화다. 2003년 미국 유타의 블루존 캐년에서 홀로 등반하던 아론 랠스턴은 좁은 절벽 사이를 내려가다 굴러 떨어진 바위에 오른팔이 짓눌려 절벽 사이에 갇혔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영화는 127시간 (만 5일하고도 7시간) 만에 스스로 팔을 자르고 살아나온 아론의 생존기를 그렸다. 뼈를 부러뜨리고, 조그만 주머니칼로 자신의 팔을 자르는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한 바람에 구토하는 관객도 있었고, 중간에 일어선 관객도 있었다. 

영화 자체로는 성공한 영화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주인공의 심리를 생생하게 전해준 점에서는 높이 평가한다. 절망은 포기고, 포기는 곧 죽음이다.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는 비록 오른팔은 잃었으나 생명을 얻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또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은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준다.
예전에 설악산 산장지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산길을 걷다가 약 100m 전방에서 표범(표범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점박이 큰 동물이었다고 했다)이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표범과 눈이 마주치지도 않았다. 먼발치에서 잠깐 스친 것뿐인데도 온몸이 얼어붙었다고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꼼짝하지 못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아마 현실에서는 그럴 것이다. 속담은 물론이고 실화인 '127시간'도 나와는 상관없는, 상상 속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2023년 대한민국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비록 지금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 같아도, 뗏법이 통하는 것 같아도, 경제가 다 망가지는 것 같아도, 도저히 더 살 수 없을 것 같아도 과거 힘들었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희망적이다.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은 맞는 것보다 틀리는 게 더 많다. 그들의 전망은 항상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면'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저력을 믿는다. 평소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이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놀랄 만큼 큰 힘을 발휘한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가 그랬고, 월드컵 때 '거리 응원'이 그랬다. 섭씨 40도가 넘는 중동 사막에서도 쉬지 않고 일하고, 백야 때 알래스카에서 하루 3라운드 골프를 치는 사람이 한국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국과 일본을 우습게 보는 민족이기도 하다. 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좋겠다는 새해 소망이 있다. 
한국의 정치는 명실공히 삼류다. 일류 경제, 일류 문화, 일류 국민이 삼류 정치에 휘둘리지 않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를 뒤돌아보면 위기는 항상 기회였다.

 

손장환 작가
손장환 작가

손장환 작가 : 경동고,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
전 중앙일보 체육부장.부국장, jtbc 문화스포츠부장, 중앙북스 상무.
현 출판사 LiSa 대표. 저서로 부부 에세이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와 소설 '파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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