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맞서 부(富)와 노래를 포기한 진정한 가인(歌人) 

김도현 칼럼니스트
김도현 칼럼니스트

아니 이게 웬 일입니까? 도둑이 들었습니다. 내 슈퍼에 도둑이 들어서 현금을 싹 쓸어갔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둑님! 10원짜리는 남겨두어서...아뿔싸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에라 모르겠다. 신문이나 보자! 새벽신문을  펼쳐들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조금 전 일은 잊어버리고 너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2014년, 그러니까 벌써 8년 전 일이 되었습니다. 원조 디바 '김추자 33년만의 컴백, '늦기 전에' 김추자가 돌아온다. 도하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한 김추자의 컴백 소식에 나는 금세 44년 전으로 돌아갔다.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 빠졌다가 오색구름이 만발한 하늘나라로 둥둥 날아가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13가지 신문 모두를 구입해서 김추자 컴백 기사를 오려 스크랩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잠시 영등포 우체국 발착계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발착계는 우편물을 분류하고 일부인을 찍는 곳이었는데 푸른 제복 때문인지 직원들 모두 무뚝뚝했고 나이도 많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무뚝뚝한 직원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리듬에 맞추어 고개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습니다. 순간 그 모습들이 신기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은 먼 곳에...' 이렇게  흘러나오는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였습니다.     
그 때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그녀만의 엄청난 호소력과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영혼을 흔드는 목소리는 우체국 직원들의 마음을 일거에 무너뜨렸습니다. 강력본드로 붙여놓은 것 같았던 그들의 입가에서 아! 소리를 연발하며 입을 벌리도록 했습니다. 

그 때 나는 돌부처들의 마음 한구석에도 섬세한 감정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 때부터 김추자의 열성 팬이 되었습니다.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봄비', '댄서의 순정', '꽃잎', '후회', '그럴 수가 있나요', '나뭇잎이 떨어져서', '무인도', '거짓말이야',

이런 그녀의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야외전축에 헤드폰을 끼고 밤새 들어도 좋았습니다. 마치 마약에 도취된 듯 때로는 몽유병 환자처럼 내 영혼은 하늘나라를 둥둥 떠다니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나를 깊은 바다 속으로 빠뜨려 고통에 울부짖게 하기도 했습니다. 옛날 헤드폰은 오래 들으면 귀가 멍멍했는데 그런 것조차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당당하며 자유분방한 그녀의 성격은 그 시절 자유를 억압당해서 울분에 찬 내 마음을 대신 해 주는 것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만의 그런 성격 때문에 그녀가 당해야 했던 불이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정부 고위관료, 방송국 PD간부들에게 고분고분 했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긴 세월 가수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너 번 가수왕은 물론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많은 히트곡을 발표해서 가요계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했을텐데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녀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전설'이라는 수식어는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가수들의 인권도 지금처럼 보장되지 않았으니 그녀는 가수들의 권익 향상에 커다란 공로자임이 틀림없습니다. 록, 솔, 트로트, 심지어 민요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던 그녀의 노래들은 발표되는 즉시 대 히트를 쳤습니다. 

그 당시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이 주일의 10대 가요에 항상 서너 곡이 최상위권을 올랐을 정도로 우리 가요 사상 최단 기간에 최대 히트곡을 남긴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는 곱지 않게 보는 세력들 때문에 큰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대마초를 한번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피우지도 못하는 대마초를 피웠다느니 대마초를 흡연해 노래를 잘 하고 몇 옥타브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간첩과 내통했다는 등 모함을 당했습니다. 

또 '댄서의 순정'은 너무나 잘 부르니까 창법이 저속하다는 등 가수왕 심사위원들을 핫바지라고 놀렸다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녀를 탄압했습니다. 김추자의 노래는 줄줄이 금지됐고 심지어 방송국 출연 정지까지 당했습니다.     

'칠레국제가요제'는 가수와 작곡자가 동행을 해야 하는데 작곡자 부인께서 김추자는 못 믿겠다면서 가수 교체를 요구하는 탓에 결국 가요제 참가를 포기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없는 돈을 모아서 그녀의 레코드판을 구입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녀의 히트곡 '후회'처럼 많이 후회됩니다. 지금 그녀의 LP판은 엄청난 돈을 주고도 구입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당시 럭비공 같았던 내 청춘을 울고 웃겨주던 내 스타에 대한 나의 보답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즐거워집니다.

언젠가 MBC에서 김추자 컴백 쇼가 있었을 때 조영남 씨가 꽃다발을 갖다 주었는데 조영남 씨가 누구입니까? 자유인 조영남 씨가 꽃다발을 갖다 줄 정도면 김추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웬만한 가수 같았으면 온갖 시련 앞에서 허물어지고 자포자기 했을 텐데 그런 것쯤 우습다는 듯 대학교수 부군을 만나 가요계를 떠나버렸습니다.  

가끔 들려오는 그녀의 컴백 설은 항상 내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어느 날 한 후배가 그녀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그 후배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가수와 가요는 많지만 대중가수, 대중가요가 사라져 버린 요즘 가수 김추자를 그리워하는 건 그가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전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겐 커다란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아직도 내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김추자는 나를 청춘으로 만들어주는 보약과도 같은 존재이고 행복의 문(門)입니다.  
또 다시 그녀의 컴백 소식을 기다리느라 내 귀는 어느 덧 토끼 귀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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