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 필요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일제 강점기에 발표된 소설 중에  '눈 오는 국경의 밤'이라는 것이 있다.

'한청(韓靑)'이라는 잡지 1937년 2월호에 실렸는데, 작가는 '무지(無之)'라는 필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누구인지 밝혀진 바는 없다.

'한청'은 김구가 이끌던 한국국민당' 산하 조직인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기관지였다. 

당 선전부장 엄항섭이 지도하던 청년단은  김구의 장남인 김인(金仁)과 안중근의 조카이자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장남인 안우생(安禹生)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청년단은 김구의 지도 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전위조직이었으며, '한청'은 그의 지도 이념에 입각해 민족적 대일 항쟁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선 선전기관이었다.

'한민족독립운동사'.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는 윤봉길의거 이후 눈에 불을 켜고 뒤를 쫓던 일본군을 피해 상해를 떠나 항저우, 난징, 창사 등을 옮겨다니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작품은 '대한독립군' 휘하 만주 항일 무장 투쟁대의 국내 진공 작전을 그리고 있다. 

'대한독립군'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8월, 전투기를 여섯 대씩이나 띄워가며 유해를 봉환해 온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 등이 주도해 만든 창설한 독립군 부대였다.

 '대한독립군'은 이듬해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될 때까지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의 국경 지역을 무대로 여러 차례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 

'눈 오는 국경의 밤'이 이들 국내 진공 작전 중 어느 것을 소환한 것인지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기소설의 범주에 들만하다. 

41자 182행의 분량에 지나지 않는 이 작품의 경개는 이렇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추운 겨울 밤. 독립군 대원 몇 명이 오십 리 길을 걸어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 규모가 큰 한 마을로 숨어 들어갔다. 

일행은 먼저 그곳에 남아 암약하고 있던 연락책의 집으로 가서 음식을 얻어먹고, 그의 안내를 받아 면사무소로 가 자고 있던 서기 두 사람을 깨워 일본 군대에게 보내려던 돈을 탈취했다. 

대원들은 '대한독립군 몰수'라는 메모만 남긴 채 사무소 안의 모든 서류들을 내어 불지르고 떠났다. 

난데없는 불길에 마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사이 대원들은 주재소로 접근했다. 

순사들은 모두 비상이 걸려 면사무소로 달려가고 일제의 개 노릇을 하는 '김순사'만 남아 있는 주재소에서 장총, 권총, 탄환 등을 몰수했다. 

역시 서류들을 내어 불지른 뒤 결박지은 김 순사를 끌고 국경을 넘으려다 경비병들에게 발각되어 총격전이 벌어졌다.

불행히 독립군 한 명이 희생되었다. 붙잡아오던 김 순사는 일제 경비병이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돋자 대원들이 간밤에 건너온 강 저편을 향해 눈물로써 희생된 동지의 명복을 빌었다.

발표지 '한청'이나 작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국경 너머 망명지에서 벌이고 있는 국내 진공 작전의 실상을 알림으로써, 3.1만세운동이 좌절된 뒤 자칫 빠져들기 쉬운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항일 저항 의지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 

작품이 발표된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일제의 잔악스런 토벌로 인해 만주를 거점으로 한 항일운동 조직이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지경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식민주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더해가는 터에 민족운동은 오히려 지리멸렬하고 식민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투항적 인식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이런 객관적 정세 아래서 작품은 시난고난 사위어 가고 있는 민족의 항일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20년대 초 왕성하게 전개된 국내 진공 작전을 소환한 것이다.      

최근 세종시의 한 중학교 기간제 교사가 수업 중 김일성을 '장군님'이라 칭하면서,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고 있는 '보천보 전투'를 미화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거리가 되었다.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누구라도 금방 보천보 전투로 추정할 수 있는 전투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견줄 만한 전투로 소개하면서 '그 전투가 교과서에 안 나오는 이유는 이를 주도한 게 '김일성 장군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매체들에 따르면, 그는 또 '미국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권력 욕심이 많았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미국의 말에 혹해 서울로 귀국했다'는 등,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발언도 한 것으로 전한다. 

지난 2019년에는 서울의 인헌고등학교에서 교사들의 정치 편향적 발언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공개적 집단 행동에 나선 바도 있거니와, 그릇된 역사 인식과 정치적 편향성을 띤 교사들로 인한 교단의 왜곡 현상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 된 지 오래다.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동북 항일연군과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원 약 170여 명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주재소를 습격한 국내 진공 작전 중 하나다. 

북한에서는 이를 김일성의 항일 투쟁 최대 업적으로 선전하면서 김일성 우상화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보천보를 성역화하기도 했다. 

모든 문화 예술 장르의 중심 제재로 끊임없이 호명해 재생산하고 있지만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다. 

역사 자료에 의하면 이날의 전투 규모와 전개 상황은 앞의 '눈오는 겨울 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보천보 주재소에는 일본인 순사 3명과 조선인 보조원 2명이 있었다. 

처음 주재소 습격 시에는 어린아이와 조리사 등 민간인 2명을 희생시켰을 뿐이며, 이튿날 벌어진 추격대와의 전투에서 일본인 경찰 7명을 사살하고 14명에게 부상을 입힌 대신 항일연군 측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어져 수백 명의 조선인이 검거되고, 실낱같게나마 명백을 잇고 있던 만주 거점 항일운동이 치명적 타격을 입은 것은 말할나위도 없다. 

다만, 칠흑같던 일제 말기의 객관적 정세 속에 독립의지를 잃지 않게 하는 하나의 빛이 되고, 패배의식이 팽배해 가던 민족사회에 일순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당시 '동아일보'가 호외를 내어 크게 보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북한에서 지나치게 부풀려 과대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천보 전투가 과연 김일성 영도하에 있었던 일인가 하는 문제는 그동안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본래 만주를 거점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1937년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실제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쫓겨 소련에 망명해 있던 젊은 김성주가 그의 명성을 가로채 김일성으로 둔갑한 것이라는 '가짜 김일성'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김일성 영도'설을 확실하게 뒤집을 만한 논거가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 2017년, 중국 연변 출신의 유순호(兪順浩) 작가가 집필한 '김일성 1912~1945'(전3권)라는 방대한 분량의 평전이 간행되면서 보천보 전투를 포함한 김일성 행적의 진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전기가 되고 있다. 책의 내용은 '왜곡과 과장, 편견과 거짓을 걷어낸 진짜 김일성'이라는 부제 속에 함축되어 있다. 

북한에서 간행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비롯한 관련 저술들을 샅샅이 살피는 외에, 1982년 이후 무려 16년에 걸쳐 중국 동북3성을 직접 답사하며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 

이런 사실을 포착한 북한 당국은 유 작가를 회유하고 압력을 가했다. 작가는 신변의 안전까지 걱정되는 상황이 되자 2002년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에서 집필했다.  

북한은 김일성이 2백 명도 안 되는 빨치산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 보천보를 습격해 수천 명의 일본군을 섬멸한 뒤 구경 나온 사람들을 상대로 연설까지 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인즉, 이는 구구하게 논거를 들춰가며 시비할 거리도 못 된다. 

김일성이 가랑잎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으며, 축지법을 써 하룻밤에 천 리 길을 내닫고 모래로 쌀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의 주장 아닌가. 

저들의 거짓과 허위에는 이골이 날 만큼 되었으니 더 이상 탓할 바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맹목적인 북한 추수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자라는 젊은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는 길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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