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길 위로도 길이 지나고 길 아래로도 길이 지난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게 그리 오래지 않다. 사람도 웬만큼 나이를 먹으면 예지가 번득이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길이 느껴졌다. - 정우영 시 ‘우리 밟고 가는 모든 길들은’ 1

세상에는 참 많은 길이 있다. 사람들 사는 고샅부터 산이나 호수, 섬을 돌아보는 둘레길, 도시의 12차선 대로, 고속도로, 열차가 오가는 기찻길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꼭 사람들이 밟고, 타고 다니는 길 만이 길일까? 아니다. 우리는 매일 눈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음의 ‘길’을 내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바로 손길과 눈길, 발길, 꿈길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이런 ‘길’은 서로 만나면서, 격려와 희망도 되지만 때때로 갈등을 일으키고, 좌절과 패배를 안겨주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외자의 우리말을 고르라면 나는 의당 ‘길’이다. 한자로 도道 자가 ‘길 도’인데 참 웅숭깊은 낱말이다. 열자 표현대로 ‘죽는다는 것은 길을 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길이라는 인생길을 걷는 ‘도인’ 아니겠는가? 도인(道人)이라면 흔히 득도한 고승이나 현자를 일컫지만 사실 사람이면 누구나 길 위의 인간- 도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라지만 그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일은 실로 지난한 문제이다. 어떻게 한뉘를 살아야 잘 살았다고 평가를 받고, 또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며 죽음을 맞는 것인지...1960년 전북 임실 태생인 정우영 시인은 ‘길’을 느꼈다는데 1959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나는 아직 그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면 엄살일까? 분명 정 시인은 진정한 도인의 반열에 오른 듯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국의 신예작가 셰릴 스트레이드의 감동적인 말을 곱씹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한 번은 길을 만든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지속적인 학대를 받았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이 해체되었고, 그리고 이혼까지 26세의 젊은 나이에 인생의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스트레이드는 미국의 남쪽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북쪽 캐나다 너머까지 무려 4,285km, 1만 리를 혼자 걸으며, 새로운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9개의 산맥과 사막, 황무지의 그 땅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 두려움, 외로움과 싸운 것이다. 이런 여정을 담은 책 “와일드”가 영화화되면서, 지구촌 사람들에게 뜨겁고 감동적인 희망의 길을 터주었다.

길 위의 풍경- 사람은 사람과 자연에게서만 배운다. 그런데 자연은 말이 없어서 저마다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장엄한 해돋이와 해넘이를 보고 한순간 숙연해지는 것은 ‘길’이 엄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초저녁 서편 하늘에 뜬 초승달을 보지 않아도, 선 새벽 그믐 가는 달을 보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가슴에 새기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그런 자연을 이따금 바라보고, 간직하며 사는 이의 길은 조금이라도 더 깊고, 아름다운 모양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책은 길 위의 친구- 곧 도반 같은 존재로 시공을 거슬러 죽은 축과 산 이들을 아우르는 존재다. 때문에 늘 가까이할 대상이다.

청년은 미래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고 말들 한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지나온 산길이 훤히 보이는 법. 어렵고 힘들고, 숨이 차도 묵묵히 걸어온 자신만의 길- 그런 ‘길’을 돌아보게 되는 나이가 과연 정해져 있는 것일까? 늘 반성하면서 한편으로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길은 언제나 새롭게 열릴 것이다. 뼈 아픈 현실을 승화시킨 세릴 스트레이드처럼 우리는 그런 자세를 견지해야 풍요로운 한 살이가 되지 않겠는가?

오랜 지인인 한의사가 병원 문을 닫고 유럽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다. 프랑스 남부 국경부터 예수의 열두 제자였던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에 이르는 800km의 길- 경부철도가 441.7km이니 서울과 부산을 걸어서 왕복하는 대장정이다. 부디 정 시인의 시구대로 ‘번득이는 예지로’ 자신의 길을 재발견하시기를 비손한다. 그의 나이는 이제 지천명을 넘어 이순 문턱인 5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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