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 들이다 -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 부분

시인 백석(1912-1996)은 일본 유학 시절이나 서울에서 시작 활동을 하면서 늘 고향을 잊지 못했다. 그의 고향 평안북도 정주는 민족시인 김소월(1902-1934)이 태어난 구성군과 이웃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시인을 통해 북방의 겨울 풍경과 한민족의 고유 정서를 영원히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숫눈이 이듬해 늦봄이 되어서야 녹는 적유령산맥의 두메산골. 여우가 울며 깊어가는 산간의 밤, 밤새 댓돌의 신발에 눈이 수북이 쌓이는 초가들. 아침에는 밥을 짓는, 저녁이면 군불 때는 연기가 모락거리며 피어나는 씨족 마을. 그 고장의 겨울철 식탁에는 갈무리한 각종 산나물과 바닷고기가 풍성하게 오른다.

어느 해 음력 정월 초하루의 설날- 부모님을 따라나선 백석은 ‘고무’의 아들딸과, ‘삼춘’네 식구들을 죄다 만나고, 한상에서 밥을 먹는다. 붕어곰국, 무이징게국, 고추무거리, 호박떡, 마타리 회순, 죈구기송편, 명태창란젓, 가재미... 백석은 시 ‘국수’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겨울밤 쨍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지금 여기의 맛은 생활이고, 과거 그때의 맛은 추억인 법. 누구나 유년시절의 반찬이나 주전부리 그 맛을 평생 잊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고단한 삶에 부대낄 때 떠올리는 그것들은 걱정 하나 없던 어린 시절로 이끈다. 해와 달, 그리고 별과 함께 산천을 누비던 회억은 아무리 던적스럽고 고약한 일상이라도 악착같이 살아가라는 무언의 응원이다. 첫 울음을 터뜨리며 친척들의 환한 웃음 속에 세상에 온 땅- 그곳을 우리는 고향, 모향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어머니의 할머니가 그러셨듯이 부모님의 몸과 마음 꼭 절반씩 빌려 온 환한 나라- 우리가 명절이면 기를 쓰며 찾고, 다시 떠나 돌아오는 그곳이다.

명절은 말 그대로 ‘이름이 있는 마디’인데 현대에는 설과 추석 이외에는 거의 쇠지 않는다. 사실 365일 그날이 그날 같아도 특별하게 명칭을 갖는 날이 있다. 음력 1월 1일처럼 양수가 겹치는 날은 중일 명절로 각별한 하루인 것이다.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양절. 또한, 달이 가장 환한 음력 15일 보름도 마찬가지로 1월 보름이 대보름이고, 6월 보름은 유두, 7월 보름이 백중, 8월 15일은 추석이다.

이처럼 29일이나 30일 한 달을 주기로 삼는 태음력은 365일의 태양력과 며칠씩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24절기가 등장하는데 농경사회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가늠하는 잣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양력의 이날들 역시 절후 명절이라 해서 음력의 명절처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입춘이나 팥죽 먹는 동지 정도만 기억할 뿐 안중에 없게 되었다. 물론 소서와 대서는 몰라도 24절기에 들지 않는 초, 중, 말의 복날이면 각종 보양식을 찾는다. 여름철 가마솥더위에 지친 몸을 돌보라는 선인들의 생활지혜를 한번 떠올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제 24절기를 포함한 명절을 지키기보다 그날의 의미를 새겨보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명절은 사시사철의 변화는 물론 시기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엇에 감사하며 잊지 말아야 하는지 내포하고 있다. 서양풍속인 2월 14일의 발렌타인데이보다 우리의 음력 7월 7일 칠석이 더 오래된 ‘연인의 날’임을 알아야 한다. 사리와 이치에 밝으려면 잊혀진 고유 명절을 잘 살펴볼 일이다.

추석과 함께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코밑이다. 이 글 중반에 인용한 ‘국수’에서 백석 시인이 우리에게 묻는다,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시대가 변하면서 귀성 풍속도나 선물도 많이 변했다. 또한 24절기나 명절의 참뜻이 가물가물한 지 오래다. 또한 그런 것을 몰라도 살아가기가 불편하지 않다. 어린 눈에 담은 고향의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시로 승화시킨 백석- 그는 진정한 고향정신을 잃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회두리에 사람은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여행을 하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때문에 명절에 고향을 다녀오는 것은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백석은 각박한 타향살이에서 자연과 더불어 피붙이들과 지내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순박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생가에서 조상의 무덤이 즐비한 선산까지가 저마다의 일생이다. 시작과 마침 그 직선을 에움길로 살다가 마침내 잇고 마는 사람들.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과연 고향의 무엇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 이번 설날에는 백석의 물음에 답을 찾아보면 좋겠다, 태어난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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