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철 부산취재본부장

바다 한가운데서 / 너새니얼 필브릭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 에드가 앨런 포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뜨겁다. 드라마에서 거액의 상금을 놓고 참가자들이 벌이는 생존 게임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무한 경쟁이 빚어내는 현실의 삶과 다르지 않다. 토박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목숨을 거는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시대를 공유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거대한 세트장을 배경으로 여섯 가지 게임이 펼쳐진다. 특히 구슬치기 장면에서 미묘하게 변하는 인간의 감정선이 돋보인다. 2인 1조로 짝이 된 참가자들은 힘을 합쳐 다른 팀을 물리치자고 의기투합한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옆에 있는 짝의 구슬을 모두 따야 승자가 된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간. 살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속이고 엇달래며 감춰둔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잃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논픽션 작가인 너새니얼 필브릭은 해양 논픽션 '바다 한가운데서'를 통해 이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19세기 최대의 해양 참사로 기록된 비극적인 사건을 생생히 묘사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1820년 어느 날, 포경선 에식스호는 남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의 공격으로 침몰했다. 스무 명의 조난 선원들은 작은 보트 세 척에 나눠 타고 육지를 찾아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남아 있던 건빵과 식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들의 이성과 희망도 가물거렸다.

두 달이 지나면서 고통의 한계에 이른 표류자들은, 죽은 동료를 수장(水葬)하는 대신 식량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기어이 내뱉고야 만다.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제비를 뽑아서 다음 죽을 사람을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조난자들 사이의 오랜 관례였다고는 해도, 쉽게 꺼낼 수 없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들은 종이 한 장을 잘라서 네 개의 쪽지를 만들어 모자 속에 넣었다. 그중에 가장 짧은 종이쪽지가 희생자가 될 표시였다. 그 쪽지를 꺼낸 사람은 폴라드의 이종동생 오언 코핀이었다.'

선장 폴라드는 순간 경악했고,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코핀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비를 뽑은 건 공정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코핀은 뱃전에 머리를 얹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한 생존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코핀을 대신해서 죽겠다는 선장의 말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의 심정은 자기가 천 번이라도 대신 죽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코핀의 나이는 열여덟. 채 영글지 못한 삶을 동료에게 내준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본다. 내가 폴라드였고 코핀이었다면, 동료 조난자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서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아서 고든 핌은 제비를 뽑는 극한의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조난자들이 모두 제비뽑기에 찬성하자 오히려 자신의 안전을 챙겨야겠다는 생존본능이 꿈틀대는 걸 느꼈다. 제비뽑기를 앞두고 화자가 느낀 절망의 심연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내 정신은 이 끔찍한 투기의 가담자가 되기를 피할 수 있는 수천의 터무니없는 계획을 생각해냈다. 동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런 필요성을 피하게 해달라고 빌까, 갑자기 그들에게 덤벼들어 그들 중 하나를 죽여서 제비뽑기의 필요성을 없애버릴까 등등. 말하자면 내 앞에 닥친 일을 제외한 그 어떤 상황이라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  혹시 동료 조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짧은 것을 뽑도록 속일 방법은 없을까 온갖 생각을 다했다. 내 손에 있던 네 개의 조각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을 뽑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 보전을 위해 죽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 명백한 무정함에 대해서 나를 비난하려는 사람이 있거든 내가 그때 처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본 다음에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가 셜리 잭슨은 단편 '제비뽑기'에서 인간의 본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다뤘다. 인구 삼백 명의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은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며 제단의 희생양을 고르는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마다 이어져 온 인신공양이라는 풍습에 둔감했고, 자신만 아니면 누가 희생되든 상관없다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마침내 희생자가 결정되었다. 검은 점이 찍힌 제비를 뽑은 사람은 허친슨 부인이었다. 마을의 악습에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자신이 제물이 된 것을 확인하고 손을 내저으며 절규했다.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옳지 않다고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남들보다 정의롭고 선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평균을 상회하는 인간성과 미덕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쉽게 상대를 판단하고 재단하며 정죄하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 데일 카네기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뉴욕의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 소장의 얘기를 전한다. "싱싱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 가운데 자기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카네기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나는 한참 후에야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100명 중 99명은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카네기의 결론을 긍정의 관점에서 보자. 백 명 중 한 명은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에식스호의 폴라드와 코핀이 그랬듯이, '오징어 게임'의 지영(이유미 분)과 기훈(이정재 분)도 그런 희망의 싹을 보여 준다. 그들은 타인에 대한 믿음 역시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일남(오영수 분)은 백 명 가운데 단 한 사람, 일 퍼센트의 가능성마저 용납하지 않을 기세로 기훈에게 묻는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 기훈과 일합(一合)을 다투던 일남은 우리에게 서서히 눈길을 돌린다.

"정말 아직도 사람을 믿나?"

 

배종철 / 부산취재본부장
배종철 / 부산취재본부장

전 진주MBC 프로듀서
전 부산방송 KNN 프로듀서
문예운동 수필 천료(2005)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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