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철 부산취재본부장

[책 속을 걷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

지난 4일, 정호승 시인의 북콘서트가 부산솔로몬로파크에서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부산에서 열린 독서문화축제인 '2021 대한민국 독서대전' 행사중 하나였다. 

'시가 된 인생 이야기'라는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북콘서트에서 시인은 "내 삶 속에, 일상 속에 시가 가득 들어 있다. 내 삶이 곧 시다. 내 삶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시를 쓴다."고 했다.

정호승 시인의 '삶이 시가 된 이야기'는 작년에 시인이 내놓은 시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1972년에 등단한 시인은 그동안 열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천여 편의 작품 중에서 60편을 뽑아 산문과 함께 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에 수록된 작품 모두가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고 깊은 공감을 자아내지만, 목차의 첫 번째 시 '산산조각'은 특히 눈에 띈다. 시인 역시 이 시를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아끼는 시라고 소개한다.

"내 인생에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내 인생을 위로하고 위안해 주는 단 한 편의 시를 꼽으라면 바로 이 시 '산산조각'을 손꼽을 수 있다. 내가 쓴 시 중에서 내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단 한 편의 시가 있다면 바로 이 '산산조각'이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 전문)

정호승 시인의 책을 읽는 동안 공교롭게도 몸과 마음이 산산조각 날 뻔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며칠 전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다가 세 계단을 남겨두고 발을 헛디뎠다. 몸은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했고, 왼쪽 팔꿈치와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목도 충격을 받았는지 몹시 아팠다.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제 오후에 가까운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카드 발급을 주선하고 카드사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모양이었다. 그는 삼년 째 암 투병 중인 쉰한 살의 가장이다. 이 일 만으로는 병원비와 생계를 해결할 수 없어서 최근에 오토바이 배달기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2주 간격으로 받던 항암 치료도 일할 시간이 부족해 3주 간격으로 조정했다. 항암 치료를 받지 않는 날에는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내 몸의 통증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산산조각이 나지 않은 일상에 대한 감사와, 산산조각을 받아들일 작은 용기도 일었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부딪쳐도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인의 경우는 달랐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그의 밝은 목소리 앞에서 결코 '산산조각'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는 산산조각과 이미 한몸이 되어 있었다. 산산조각이란 내게는 모호한 관념이었고, 그에게는 명확한 현실이었다.

종소리는 종의 침묵이다/ 새소리는 새의 침묵이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는 바람의 침묵이다/ 산사의 풍경 소리는 진리의 침묵이다/ 여름날 천둥소리는 거룩한 하늘의 침묵이다/ 별들이 가장 빛날 때는 바로 침묵할 때이다/ 꽃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도 바로 침묵할 때이다 ('침묵', 부분)

신이 침묵으로 인간을 사랑하듯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과 자연도 침묵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 시인은 우연히 들른 낙산사에서 산불에 탄 동종을 보았다. 형체는 녹아 내렸지만 오백 년 동안 울려 퍼졌던 종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꼈다. "불타버린 낙산사 동종의 침묵, 그 침묵에서 나오는 종소리야말로 바로 내가 지향해야 할 시의 세계다."

병마와 싸우는 지인 역시 침묵의 종소리를 품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헤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속마음을 털어놓자면, 그 침묵의 무게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   

발을 씻을 때 손은 발을 사랑했습니다/ 손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손이 되었습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두 개를 움켜쥐어도/ 손은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손에 대한 묵상', 부분)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 내 손에 다른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는 없다. 소유의 손은 반드시 상처를 입으나 텅 빈 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그동안 내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얼마만큼 잡았는지 참으로 부끄럽다."

 

배종철 / 기자
배종철 / 부산취재본부장

전 진주MBC 프로듀서
전 부산방송 KNN 프로듀서
문예운동 수필 신인상(2005)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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