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관촉사 석등보물 제232호(1963. 1. 21 지정),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 (관촉동)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
흑석동산성대전시 기념물 제15호 (1990. 5. 28 지정), 대전 서구 봉곡동 산26-1번지대전광역시 서구에 봉곡동 해발 197m의 고무래봉 정상에 있는 산성이다. 백제 때 산성으로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형태이며, 둘레는 470m에 달한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며, 바깥쪽 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을 채우는 방법으로 만들었다.남벽은 해발 185m의 능선에 만들었고, 문터는 남문터만이 남아 있는데 그 폭은 2.8m 정도이다. 남벽은 서쪽 성벽 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조금 올라온 뒤 꺾여져 북쪽 성벽으로 이어진다. 북쪽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2018. 4. 20 지정),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968년경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이번에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국보로 승격하게 되었다.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1981. 3. 18 지정), 충북 충주시 감노로 2319 (중앙탑면, 충주고구려비전시관)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부강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세종시 문화재자료 제10호 (2012. 12. 31 지정), 세종시 부강면 금호리 712-3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검담서원의 묘정비와 강학공간으로 이용했던 정자인 보만정이다.송준길은 조선 효종∼현종 때의 문신으로 예학에 매우 밝았다.보만정은 원래 현종 10년(1669) 동춘당 송준길이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려고 이곳 검담에 세운 정자이다.숙종 20년(1694)에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검담서원을 세웠는데, 이 때부터 보만정은 검담서원의 강학공
갑사 동종보물 제478호 (1968. 12. 19 지정), 충남 공주시갑사동종(甲寺銅鐘)은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하나의 몸체로 이어져 서로 반대로 머리를 돌린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팔괘정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1978. 3. 31 지정),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팔괘정은 조선 인조 4년(1626)에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하는 정자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금강변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왼쪽으로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시를 쓴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뒤의 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글자가 있다.
임리정충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 충남 논산시 강경읍 금백로 20-8(황산리)조선 인조 4년(1626) 사계 김장생(1548∼1631)이 지은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원래의 이름은 황산정이었으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얇은 얼음장을 밟는 것과 같이, 자기의 처신과 행동에 항상 신중을 기하라”라는 '시경'의 구절을 따서 임리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앞면 3칸의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왼쪽 2칸은 마루
영동 송시열 유허비충북도기념물 제46호(1977. 12. 7 지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정을 기리고, 그의 옛 자치(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재를 짓고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1996. 5. 30 지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국립부여박물관)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1963. 1. 21),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쌍북리)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백남우 해설사]부소산 뒤쪽은 백마강이고 안쪽은 테뫼식 산성이 있었다.궁궐터는 부소산 앞쪽,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왕족들의 내궁.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금산 칠백의총사적 제105호(1963. 1. 21 지정),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영동 한천정사충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1999. 9. 15 지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동 1길 48우암 송시열(1607∼1689) 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집이다.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졔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후에 우암의 제사를 모시는 한천서원을 세웠었는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을 철거하였고 후에 후학들이
김익희의묘대전시 기념물 제5호 (1989. 3. 18 지정), 대전 유성구 대덕대로 507-150(가정동)김익희(金益熙:1610~1654) 선생의 자는 중문(仲文)이요 호는 창주(滄州)이다.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손자로서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을 지내는 동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 활약하였다.효종 때는 승지, 대제학 등을 지냈고, 벼슬이 찬서에 이르렀다.대전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뒤쪽 야산에 위치한 묘역은 선생과 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그 일가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묘의 왼쪽
유회당(부)기궁재대전시 유형문화재 제6호 (1989. 3. 18 지정), 대전 중구 운남로85번길 32-20 (무수동)유회당과 기궁재는 권이진(1668∼1734)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과 그에 소속된 재실로 보문산 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유회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건물로 활수담이라는 작은 연못 뒤쪽에 있다. 앞면과 양쪽 면에 난
유회당판각대전시 유형문화재 제20호(1991. 7. 10 지정), 대전시 중구이 책판은 유회당 권이진(1668∼1734) 선생의 문집을 새기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권이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외손자이다. 권이진은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다.172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민간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과 공물을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할 만큼 성격이 곧고 강직하였다. 이 문집에는 시와 소(疏:상소글) 등이 실려있으며, 유회당 선생이 관직에 있던
구성동산성대전시 기념물 제6호(1989. 3. 18 지정), 대전 유성구 구성동 산4-3번지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에 있는 성두산 정상의 지세를 이용하여 산의 안팎을 적절히 깎아 급경사의 성벽을 이룬 산성으로, '거북성'이라 부르기도 한다.현재 거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성의 윤곽석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성안에는 너비 8~10m의 도랑이 둘러져 있는데, 이것은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이 산성은 성두산 정상부에 축조한 북성과 남으로 뻗은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남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쪽 성벽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제 799호(1984. 11. 30 지정),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마곡사(운암리)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김구는 명성황후 사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항나무가 자라고 있다.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타빈(塔身)을 올린 후
옥천 송갑조 유기비충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2006. 4. 7 지정) / 충북 옥천군이 비는 송갑조(1574-1628)가 살던 집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4년에 후손들이 세웠다.송갑조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은진이며 자는 원유(元裕) 호는 수옹(睡翁)이고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이다.그는 1617년(광해군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생의 명단에서 삭제되어 벼슬길이 막혔다.그 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강릉 참봉을 지냈으며 다음 해 이괄의 난 때 공주(公州)로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북도 기념물 제45호(1979, 09. 29 지정), 충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