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철 부산취재본부장

지난 토요일 오후, 이색 연주회가 열리는 부산 기장군 정관읍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집 현관에 '뮤지카오스(음악이 흐르는 집)'라는 팻말이 보였다. 이탈리아어 'Musica house'를 차용한 이름이었다. 거실 한쪽에 그랜드 피아노가, 뒤쪽으로는 서른 개 정도의 의자가 놓였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빈자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관객들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뮤지카오스에서 준비한 4월 첫날의 '하우스 콘서트'를 기다렸다.

잠시 후, 스크린에 투영된 화사한 벚꽃 영상을 배경으로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피아노가 빚어내는 조화로운 선율이 거실 공간에 만개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약동하는 멜로디의 향연이었다. 연주자들이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사랑의 기쁨'에 이어 쇼팽의 '녹턴 2번(Nocturne Op.9 No.2)'을 연주하자, 관객들은 음의 미세한 떨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몰입했다. 

 

부산뮤지카오스 하우스 콘서트 / 부산뮤지카오스 제공
부산뮤지카오스 하우스 콘서트 / 부산뮤지카오스 제공

이번 연주회의 기획자는 이 집에 살고 있는 김정훈 피아니스트(43)다. 대학에서 기계자동차공학을 전공한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일과 꿈,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축의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스물다섯의 이른 나이에 취업하여 여느 직장인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김정훈은 불혹을 앞둔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접하며 자랐고, 군 복무 중에는 2군사령부에서 음악밴드에 몸담기도 했다. 그동안 내면 깊숙이 쟁여 놓았던 꿈이 시간과 함께 여물어 숙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취미 삼아 즐기는 '딜레탕트(dilettante)'로 아쉬움을 대신하려 했지만 이미 발아한 꿈을 쉬이 거둘 수는 없었다. 내친 걸음에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 레슨을 받으며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고, 올해 초에는 전국음악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결실도 거뒀다. 촉망 받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한 것이다.

음악을 무척 사랑한 철학자 니체가 생각났다. "음악이 없다면 삶은 하나의 오류일 것이다."라고 했던 니체에게 음악은 사유와 성찰의 시작점이었다. 그는 저작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체를 음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술 안에서 진정한 부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니체가 음악적 영감을 매개로 대작을 완성했듯이, 피아니스트 김정훈 역시 음악을 통해 삶을 완성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정훈은 '하우스 콘서트'에 애착을 갖고 있다. 콘서트가 열리는 날에 아파트를 찾는 사람은 서른 명 안팎. 연주자들의 개런티를 관람료로는 감당할 수 없어 사비로 메우기 일쑤다. 그래도 기꺼이 콘서트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이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그를 부추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하우스 콘서트'의 매력을 술에 비유한다. 무대 공연이 술에 물을 탄 느낌이라면, 눈앞에서 연주자의 호흡, 표정, 동작이 더해진 음악의 풍성한 밀도를 체감할 수 있는 '하우스 콘서트'는 술을 원액 그대로 음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은 고추나 깨나 기름 같은 것이라고. 예술이 없어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지만, 좀 더 맛있게 밥을 먹으려면 고추와 깨와 기름이 필요하듯이 예술은 그런 것이라고. 

음악은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파동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는 이런 기운을 함께 나누기 위해 대중에 한발 다가선 뉴에이지, 영화음악,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장르로 시야를 넓히려고 한다. 그런 시도가 무르익는다면 고추와 깨, 기름의 맛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나지 않을까.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협연 / 부산뮤지카오스 제공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협연 / 부산뮤지카오스 제공 

앙코르곡은 영화 '시네마 천국' OST. 연주를 들으면서 호기심에 가득 찬 순백의 소년 '토토'를 떠올렸다. 이어서 백재진 바이올리니스트와 김정훈 피아니스트가 유키 구라모토의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를 협연했다. 영화가 전부였던 어린 '토토'처럼, 음악을 사랑한 '토토'가 건반 위의 호숫가를 한걸음에 내달렸다. 시간이 멎고 관객들도 잠시 숨을 멈췄다. 음악으로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배종철 / 부산취재본부장
배종철 / 부산취재본부장

전 진주MBC 프로듀서
전 부산방송 KNN 프로듀서
문예운동 수필 천료(2005)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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