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야당 대변인이 울산의 어떤 경찰관을 향해 “광견병 걸린 미친개”라는 막말을 퍼부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그야말로 ‘진흙탕 개싸움’ 중 뱉은 말이다. 참 품격 있는 대한민국 정치다. 그들의 정치행위야 관심 둘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그 비어다. 왜 최악의 비난에는 항상 개를 끌어들이는가? 별로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그들이….

지금은 지방선거 참패로 사퇴한 그 당 대표는 선거를 멀찌감치 앞둔 시점에 무슨 이유에선지 당 행사 때마다 가죽점퍼를 고수했다. 조폭 잡던 검사시절이 그리웠던지 겨울도 아닌데 취향까지 참 별나다.

필자는 가죽점퍼라는 걸 걸쳐 본 적도 없다. 나름의 철학 때문이다. 가죽구두를 신고 가죽허리띠를 매는 주제에 분별 있는 말일지는 모르나 동물의 피부를 몸에 두른다는 게 민망하기도 하고, 더 큰 이유는 무식하고 천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죽점퍼는 흔히 기름 발라 정갈하게 빗겨 넘긴 두발이나 새까만 선글라스, 두툼한 해골이 박힌 버클, 알 굵은 반지, 쇳조각이 주렁주렁 매달린 열쇠고리 따위와 궁합이 맞는 이미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동물프로그램을 좋아한다고 하신 적이 있다. 필자도 그렇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동물농장’ 같은 장면이 뜨면 반갑다. 가축이나 야생동물, 또는 곤충들까지 거의 모든 동물을 좋아하고 뱀도 실제에선 징그럽지만 화면으로는 재미있다. 어린 시절 봄 마당에 고물고물 기어 다니던 강아지들이나, 갓 깬 노란 병아리들이 쪼르르 어미닭을 따라다니던 풍경만큼 아름다운 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필자는 특히 개를 좋아하는데 오랜 기간 기르지는 않고 있다. 참 이중적이라 할 만한데 십여 년 전 있었던 일 때문이다. 작업실 이웃에 무척 잘해주시던 할머니가 계셨는데 어느 봄날 그 할머니 댁에 들렀을 때 알맞게 젖살 오른 강아지들이 마당에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바둑이 한 마리는 웬 일로 어린 것이 한 쪽 안구가 없었다. 주저앉아 손짓을 하니 바닥에 배를 깐 채 수줍게 다가왔다. 며칠 후 할머니가 그 외눈박이를 부여안고 작업실로 오셨다. 맡아달라는 말씀이었다. 그날로 외눈박이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아침이면 밖에서 문살을 긁으며 안달하던 녀석이 왠지 조용했다. 그날 녀석은 작업실 옆 밭에서 뻣뻣하게 언 채로 발견됐다. 낮에 젖이 불은 큰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더니, 새벽 잠결에 외눈박이가 심하게 짖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그것이었다. 어둠 속 공포에 가당찮게 저항하다가 당한 것이다. 그 후로는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강아지도 함부로 기를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별난 폭염이지만 일몰 무렵 일과처럼 작업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온다. 산길을 향해 걷다 보면 길옆 개 사육장에서 목줄에 묶인 개들이 와글와글 짖기 시작한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이 있지만 이곳 개들은 상팔자는커녕 진창 같은 바닥에서 삼동의 허허벌판 칼바람도, 요즘 같은 한 여름 땡볕도 견뎌야 하는 참으로 모진 팔자다. 예전 외눈박이 같은 바둑이나 누렁이, 흰둥이, 검둥이 등 모습만으로는 아파트 견공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데 녀석들은 왜 여기 있을까? 주인이 없을 때 안으로 들어가 비닐봉지에 넣어 온 건빵을 민주적(?)으로 같은 개수로 나눠준다. 말목에 엉킨 목줄도 풀어주고 쓰다듬고 눈을 맞추다보면 손을 핥고 난리다.

계절은 비지땀 나는 여름 한 복판. 이곳 개들은 올 삼복도 면치 못하고 어디론가 하나 둘 사라지고 만다. 옛 적 여인네들이 뒤웅박 팔자라며 한탄하듯 운명의 계절에선 개들도 인간처럼 신세한탄을 할지도 모른다. 수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는 한탄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선지 녀석들이 짖는 소리는 어딘가 구원에의 애원인 듯 들린다.

 

언젠가 KBS ‘인간극장’에서 감동적인 스토리를 보았다. 거제도에 거주하는 전직 미대교수라는 중년여성이 간암 치료차 병원에 오가던 길에 초라한 행색의 유기 견을 만났다. 녀석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치 못해 인연이라 여기고 데려 와 보살피기 시작했다. 부부는 2층에 살면서 1층은 십 여 마리의 개와 고양이들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검진에서 3기 간암이 말끔히 사라졌더라는 것이다. 담당의사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했다. 동물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교감하며 얻은 행복감이 현대의 의료기술로도 어렵던 3기암 마저 몰아내버린 것이다. 반려동물이 현대의학을 이긴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를 좋아한다. 보통은 반려동물로 좋아하지만 보신용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나도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삼복 간 한 두 번 일행을 따라 ‘‥탕’이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때마침 오늘 티브이에서 개를 가축에서 제외하고 개고기식용을 금지하자는 국민청원을 청와대가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인터넷기사에서는 2004년 보신탕 판매에 찬성하는 국민이 89.5%이던 것이 올해는 18.5%로 조사됐다고 한다. 국민소득으로 선진국진입을 말하던 우리가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시민의 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이젠 우리도 생각을 바꾸어야겠다. 아파트 거실에서 귀족처럼 생활하는 소위 팻독(pet dog)만이 아니라 사육장 개들도 최소한의 생명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똥개’라는 천시에다 일생 목줄에 매여 신나게 한 번 뛰어보지도 못하다가 명대로 살지도 못하니 불쌍하지 않은가? 종(種)으로서야 많이 섞였겠지만 그게 어떻다는 건가? 사랑하는 마음이면 3기암도 치료해주지 않는가? 품질보다 브랜드에 목매고 명품이랍시고 서양물건 걸치고 우쭐대는 사람들처럼, 혈통 따지며 혀 꼬부라지는 개 이름 줄줄 꿰는 사람들이 오히려 딴 나라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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