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영 수필가
장주영 수필가

영화 ‘어바웃타임’은 어두운 곳에서 눈만 질끈 감으면 원하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능력을 갖게 된 남자의 인생을 다룬 이야기다. 실수투성이 첫 인생은 연습으로 여기고, 완벽해질 때까지 두 번, 세 번 산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나쁜 상황들은 계속 등장한다. 끝없이 불완전한 삶 속에서 결국 주인공은 깨닫는다. 연습이 없는 미숙한 삶을 아름다운 나날로 여기며 집중해서 사는 법을. 이 순간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미소와 유머로써 사람들을 대하며 사랑으로 채운다. 오직 한번 뿐인 평범한 일상을 찬란한 추억으로 간직한다.

한국화가 초연재 김란은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제목으로 세종특별자치시 밴가드1아트센터에서 2주간 초대전을 가졌다.(2022. 6. 13. ~ 6. 25.) <화양연화>는 ‘꽃의 모습처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김란 화백은 말한다.

“그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느라 펼치지 못했던 평범한 일상을 이제는 사랑해야겠습니다. 이번 전시는 화양연화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림을 보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간직하고 펼칠 수 있는 ‘그 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장주영 평론가와 김란 화백
장주영 평론가와 김란 화백

김란 화백은 자연의 순리를 사색의 눈동자로 깊이 바라본다. 희노애락 인생이지만 낙관적인 삶의 자세로써 지나간 순간들을 찬란한 기억으로 매듭짓는 것. 우연이었지만 필연이었음으로 여기는 과거들로 모든 삶에 향을 입힌다. 그런 마음들을 그림에 옮겼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작품에 더 깊은 연륜이 배어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와 덕을 갖추고 험한 세상 앞에 한없이 겸손한 화가.

김란 화백은 살아있는 동물의 모습을 그린 영모화(翎毛畵)에 인간 세계를 통찰한 제목을 붙인다. 부엉이, 잉어, 호랑이, 새, 병아리, 곤충 등을 작품 소재로 한다. 우선 살펴보자. 친근하고 정겨운 그  제목들부터.

함께 우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 어울림, 3월의 어느날 동백, 당신을 사랑합니다, 복이 주렁주렁, 나는 행복한 사람, 여러분!, 알알이 사랑, 모두 다 꽃이야, 행복한 동행, 핑크 부엉, 행복을 담아요, 금빛찬란, 그래 그렇게, 그것봐!, 인생은 소풍이야, 둥글둥글, 까꿍, 달이 예쁘고 너도 예쁘다, 반가워, 더불어 함께, 상쾌하다, 축복, 함께 어울리며 살아요, 어둠이 깔려도, 우리끼리, 여름밤, 인연, 춥지않아, 좋다좋아 등.

그녀는 흰 바탕 위에 인생을 오롯이 쏟아붓는다. 붓놀림에 거짓이 없다. 한지 위에 몽환적 먹의 번짐과 거친데 세련된 획은 어쩌다 획득한 우연이 아니다. 수만 번 연습을 거듭한 ‘필연의 결과물’이다. 육법(六法)이 살아있는 먹이 그려내는 자취에 삶의 깊이와 노력이 묻어있다. 자연의 움직임을 순간포착하여 거침없이 그려낸 그녀의 화폭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어느 순간 ‘생동하는 뜨거운 불꽃과 강한 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초연재 김 란 화백의 내면세계다.

 

[부엉이: 알알이 사랑] 부엉이 작가로도 불릴 정도로 많이 그렸던 동물. 단박에 끝내는 붓놀림이 대충 그린 듯 거칠지만 자세히 보면 부엉이들이 진짜보다 더 생동감 있다. 세련되고 맵시있는 부엉이 모습 그대로다. 조류의 뼈대와 깃, 솜털로 더 통통한 몸이 먹의 번짐과 붓칠의 강약 속에 분명히 드러난다. 부엉이의 표정과 목을 획 돌린 모습에서 편안함과 소박함을 준다. 털 달린 짐승을 그린 영모화(翎毛畵) 속에 인간군상의 감정이 녹아있다.

 

[잉어: 둥글둥글] 잉어 작품을 보자. 굵은 붓이 종이를 휩쓸고 지나간 굴곡이 바로 잉어의 등줄기다. 점점 가늘게 마무리된 일필휘지에 건강한 척추를 가진 힘찬 잉어가 물에서 요동친다. 연한 먹의 번짐은 투명한 지느러미의 요염한 자태를 실제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잉어의 힘있는 모습에서 초연재 김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중국유학시절 배운 대륙의 강한 기질이 그녀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약한 동물보다 강한 동물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화백의 성품. 그림 앞에 겸손할 필요없다. 김란 화백이여, 본색을 드러내도 된다.

 

[호랑이: 범상치 않다.]

2022作 ‘범상치않다’는 과연 특별했다. 평범의 ‘범(凡)’이 비범한 범(虎)을 나타냈다. 호랑이의 모습이 윤두서의 자화상(18세기 초)을 보는 것 같았다. 기골이 장대한 두상과 힘있는 수염, 털 하나하나 살아있는 부드러움, 몸체는 생략하고 머리만 그린 점. 강렬한 눈빛, 남성의 표정. 전통이 아닌 변통적 도전은 옛 것은 표방하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학의 느낌이랄까. 화백은 올해 호랑이해를 겨냥해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고자 호랑이를 그렸던 것이다. 빨, 노, 파, 흰, 검정의 오방색으로 실물을 이미지화하여 호랑이의 용맹성과 에너지를 더 높였다. 즉, 코는 빨강으로 눈은 파랑으로 입혔는데 굉장히 세다. 피를 상징하는 빨강색으로 코를 그리니 건강과 생명의 상징이다. 푸른 눈은 매우 강하고 신령스런 눈동자가 됐다. 이번 호랑이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화백의 숨겨진 다른 재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란 화백의 든든한 지원군인 세종공감미술협회 이종선 회장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으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봄풀 자라듯 자란다. (불휴불식 연마심신 무성무후 춘초자장, 不休不息 硏磨心身 無聲無嗅 春草滋長)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린 새싹의 봄풀은 언제 자라고 클까 하지만 뒤돌아보면 어느새 쑥쑥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김란 작가도 많은 시간을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고 인내하며 지내온 인고의 다져진 세월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습니다.”라고.

생의 기억들을 순수한 동물로 승화하여 화폭에 쏟아붓는 김란 화백.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을 더 찬란하게 묘사하는 그녀.

그녀의 작품세계는 꽃(花)이 아니다. 불꽃(火)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아닌 ‘화양연화(火樣年華)’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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