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탁나는 1978년 10월 14일 토요일 오후, 사단에서 주관하는 대대 ATT를 받고 있는 2대대(중령 조영길) 훈련장을 위문차 방문하고 있었다. 그때 사단장으로부터 급히 사단장 공관으로 오라는 무전이 날아왔다. 테니스 하자는 호출로 알고 부대에 연락하여 운동복을 포함, 운동 준비를 하여 사단장 공관 테니스 코트로 가져올 것을 지시하고 사단장 공관으로 갔다.“여보 61연대장, 축하해요. 배병노 장군 후임으로 사격지도단장으로 명령이 났소. 연대장 후임자는 당신 동기생 방서남 대령으로 명령 났소.”“안 가면 안 됩니까?”“왜?”“연대장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 1·21사태의 재구성 Ⅱ 도주로 차단작전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방첩부대 특공대장인 나는 인왕산 기슭에서 자수한 김신조를 데리고 우리에게 협조하도록 회유, 설득해 특공대원 25명을 지휘하여 적의 도주로 차단작전을 신속히 전개했다. 오전 5시 컴컴한 새벽, 우리 특공부대원 25명은 나의 지휘하에 작전에 돌입했다. 오전 6시, 경복고 정문을 통과하여 인왕산으로 향했다. 학교 추녀 밑에 경찰 20여 명이 추위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나는 경복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토가레프 북한 권총 1정을 노획하여 불발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 1·21사태의 재구성 Ⅰ 응징보복작전 때문에?“아니, 그때 장군님께서 대위 시절 세 번씩이나 북한에 넘어가 응징보복작전을 했기 때문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거 아니었습니까?”2014년 3월, 내가 출연했던 종편의 한 앵커가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내가 세 번의 대북 응징보복작전에 나선 때가 1967년 9월과 10월이었고,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것이 3개월 후인 1968년 1월 21일이어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북괴의 1·21 청와대습격은 물론 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