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은 책임의 상징, 권리의 상징이 아니다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전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의 현대사는 가히 '완장들의 전성시대'였다고 할 만하다. 
일제강점기엔 흰 바탕에 빨간 글씨의 완장을 찬 '헌병'들의 발호가 잔인하고 악독했다. 

이들이 패망하고 물러가자 이번엔 '~동맹', '~단', '~대' 등의 이름을 단 완장들의 조직이 비 온 뒤 대나무 솟듯 생겨나 멋대로 발호했다. 

북(北)에서는 수많은 '반동'들이 완장들에게 희생당하고 남에서는 수많은 '빨갱이'들이 또 다른 완장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완장들에게는 분노가 밥이고 복수가 술이었다. 

이들의 분노와 복수는 상대방의 분노와 복수를 낳고, 그 분노와 복수는 또 다른 분노와 복수를 만들어가며 계속 재생산되어 왔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엔 알게 모르게 완장의식이 내면화했다. 
너 나 없이 완장을 선망하고, 완장을 차고 나면 또 너 나 없이 분노를 밥 먹듯 토해내며 복수를 술 마시듯 즐겼다. 

윤흥길(尹興吉. 1942~)의 대표작 '완장'은 이러한 완장들의 생리를 날카롭게 파헤쳐 보인 우리시대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할 만하다.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82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일. 이번엔 군(軍) 사모임 '하나회'란 깃발 아래 뭉친 완장들의 발호가 실로 참고 보아 줄 수 없는 지경이던 시절인데, 작가의 신변이 어떻게 온존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기 그지없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권력 한 가지가 다는 아니라며 땅도, 돈도, 계집도 다 완장이라고 눙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완장의 횡포를 염두에 둔 자기 검열의 수단일 뿐이다.

작가가 겨냥한 것은 아무도 주지 않은 권력을 억지로 사유화한 신군부 세력을 겨냥한 것으로 읽힌다. 
현 정부 출범 이후 4년여,'적폐청산'이라 쓰고 빨간 줄 쳐진 완장이 환영처럼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대처로만 떠돌면서 쌈질로 잔뼈가 굵은 주인공 임종술은 완장 콤플렉스가 심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동대문 시장 목판 장사, 포장마차 장사 등을 하며 서울 밑바닥을 떠돌던 그는 양키 물건에 손을 대다 옥살이까지 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운수회사 사장 행세를 하는 '노랑머리 아저씨'에게 고용돼 저수지 감시원이 되자 구름의자에라도 앉은 듯 거드름을 피웠다.

제각각 색깔 다르고 글씨도 다른 그 숱한 완장들에 그간 얼마나 많은 한을 품어 왔던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완장들을 얼마나 또 많이 선망해 왔던가. 

완장이란 말 한 마디에 허망하게 무너지는 자신을 '종술'은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고 있었다.
('현대문학' 327) 그를 허망하게 무너뜨린 완장이란 기껏 동네 저수지에 자라는 물고기를 지키기 위한 감시원이었다. 

그래도 그는 처음 흰색 바탕에 '감시'라고 되어 있던 것을 노란 바탕에 '감독'이라고 고쳐 쓴 위에 빨간 가로줄을 세 개나 친 완장을 차고 다니며 위세를 부렸다.
완장을 찬 채 공짜 버스를 타고 이리시 나들이를 하며 으스대기도 하고, 캠핑 겸 낚시질 하러 온 젊은이들을 혼찌검 내기도 했다. 

'종술'과 동기동창 친구인 '준환'은 아들의 중학교 입학금 마련을 위해 몰래 고기를 잡으려다 종술에게 들켜 큰 봉욕을 치르고 어린 아들은 귀청이 터져 입원까지 했다.

안하무인이 된 종술의 완장 질은 급기야 주인인 최 사장의 낚시질까지 막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결국 감시원 직에서 해고당하고 말았지만, 가뭄 때문에 수문을 열어 물을 빼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을 협박하는 바람에 살벌한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 

이에 종술의 어머니 운암 댁은 아들에게서 30년 전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인민군 치하에서 자위대원이 되어 보복 학살극을 벌이다 수복 후 토벌당한 남편의 비극을 떠올린 것이다. 
경찰에 쫓기던 종술은 탈출하고 저수지에 던져진 완장은 물 문 근처에서 맴돌기를 하고 있었다.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문재인 . 안희정 . 이재명 . 최성 등이 경쟁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본선이나 경선 모두 문재인 후보가 단연 앞서가는 구도여서 흥미가 반감된 상태 아래 진행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안희정과 문재인 후보 간에 있었던 '정의' 논쟁은 지금 생각해도 참 인상적이었다. 

듣느니 민망스러울 정도로 상대방 치부 드러내기에 매몰돼 있는 듯한 요즘의 정치판보다는 그래도 훨씬 참신하고 성숙한 수준의 정치 논쟁이었던 것이다.

논쟁은 그해 2월 19일, 부산대 행사에서 안희정 후보가 앞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두고 '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됐던 것'이라며 '누구라도 그 사람의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발언에서 비롯됐다. 

문재인 후보가 즉각 이를 맞받아치고 나섰다. 안희정의 발언에 '분노'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분노 없인 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 분노가 정의의 출발이다'라며 안희정을 겨냥했다. 

안희정의 결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문재인의 '분노라는 발언에 놀랐다.'며 '지도자의 분노는 그 단어 하나만 써도 얼마나 많은 피바람이 나느냐'고 응수한 것이다.
돌아온 답은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 없이 어떻게 정의를 바로 세우겠는가.'라는 것. 

안희정은 '분노가 정의의 출발점'이라면서도 '그러나 정의의 마지막 마무리는 역시 사랑'이라고 맞섰지만 문재인은 '분노가 깊어야 사랑도 깊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여권 지지층 사이엔 분노론이 주류였다. 결국 안희정의 사랑론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 논쟁의 의의는 누가 대통령이 되던 향후 정국의 방향을 뚜렷이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 있다. 
현 정부 들어 지금까지 멈출 줄 모르는 채 내닫고 있는 '분노의 질주'는 이 때 벌써 선명하게 예고된 것이었다. 

지갑 속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를 넣고 다닌다는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시작된 분노의 질주는 지금껏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말한 '아름다운 복수'는 한갓 구두선에 지나지 않았다. 

그 스스로 복수란 '누구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정의한, 역사에 남을 만한 명언도 현란한 수사이었을 뿐이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고, 90 노령의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모욕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 정권하에서 감옥에 간 사람이 몇이며 수모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은 사람은 또 몇인가.
분노는 파괴적일 뿐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정의로 가는 지름길이긴 하지만 자기 검열이 전제되지 않은 분노는 새로운 '완장'들의 출현과 그들의 복수극만 불러올 뿐이다. 
분노는 분노를 키우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그리고 그 끝은 공멸일 뿐이다. 

'완장'에서 교장선생님이 '종술'을 불러 야단치며 훈계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완장을 차는 사람일수록 남보담도 더 많이 고지 먹은 소작인이니깨 남보담도 더 피나게 농사지어서 추수 때는 반다시 빚을 갚아야 될 책임이 있다 이런 것이니라' 
  
완장은 책임의 상징이지 권리의 상징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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