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 이가을 시인

시의 사계

저녁이 온다 / 이재무

쿨럭쿨럭 각혈하듯

검붉은 저녁 절뚝거리고 온다

공원의 숲속 문득 적막해지고 

저녁은 쿨럭쿨럭

한바탕 함박눈 쏟아놓을 듯

잔뜩 흐려 있다

이런 날은 어디 먼데서
십수 년 소식 끊긴 인척
기우뚱, 열려있는 철대문 사이로
낮달처럼 창백한 얼굴 슬그머니 들이밀 것만 같다

쿨럭쿨럭 어제 보다 더 크게

접촉 불량의 형광등처럼 그렁그렁

앓는 소리로 저녁이 성큼,

내 속의 그늘로 들어서고 있다

 

이재무시집『저녁 6시』창비시선

 

이가을 시인
이가을 시인

[시 평설 - 이가을] 시는 <한바탕 함박눈 쏟아놓을듯> 겨울의 각혈하듯 쿨럭쿨럭 쓸쓸한 배경이다. 절뚝거리고 오는 저녁은 등장하지 않지만 숨은 화자인 사내를 보여준다. <접촉 불량의 형광등처럼 그렁그렁> 위험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 이처럼 쓸쓸하게 <내 속의 그늘 속을 들어서고 있다.> 

경쟁에 쫒기는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나 병실의 환자나 청춘이거나 모두 고달프다. 마음은 가난하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한다. 힘들다고 내색 할 수 없는 침묵은 위태롭다. 웃음은 마음을 숨기는 가면이다. 누군가는 술로 마음을 달랜다. 소주 몇잔에 몸이 뒤척뒤척 기운다. 술은 한순간 친구이자 위로의 약이 된다.  

<검붉은 저녁이 절뚝거리고> 함박눈 쏟아질 듯 흐린 하늘을 퀭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다가 노래방에서 목청껏 소리도 질러도 보고 귀가 닳도록 센치멘탈한 음악을 종일 들어보는 그렇게라도 일상의 무게를 잊을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겨울의 저녁은 춥고 매일 저녁이 온다. 한 여름도 누군가에게는 추운 겨울이다. 

소주 한잔 만큼의 걱정을 내려놓을 순 없어도 위로의 술 몇 모금은 괜찮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울어도 괜찮다. 늘 씩씩해야 하는 건 아니다. 늘 괜찮아야 하는 건 아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아플 때에 아프다고 말하자. 아프니까 사람이다. 울음도 토해내야 한다. 꾸역꾸역, 참는 동안 내 안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가. 실컷 울어도 좋은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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