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 이가을 시인

시의 사계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김기택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씨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射睛)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안 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장포(白骨藏布)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김기택 시집 <껌> 중에서

 

이가을 시인
이가을 시인

[시 평설 - 이가을] 빈집에 청구서가 오고 책이 온다. 받지 못할 전화가 온다. 죽은 사람의 집 풍경이다. 우편물은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죽은 사람은 뜯어 보지 못할 청구서를, 우편물을 한숨 쉬고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의 집엔 그렇게 말 못할 우편물이 쌓인다. 

시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을 죽은 주인을 불러내 듯 의인화하고 있다. <누군가 뜯어봐주기를 죽도록 기다리(고)> 죽은 입은 말이 없다. 우편봉투처럼 입 꾹 다물고 우편물만 쌓이는 것을 본다.

우편물은 빈집을 지키고 일상을 유지한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한가롭게 우편물을 어정거리고 있는>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햇빛과 바람을 곁눈질하고 누군가 와주길 기다린다. 

빈집은 아직 빈집이 아니다. <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 많은> 종이의 <근질근질한 혀들,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는)> 종이들의 고요한 난전(亂廛)이 벌어지고 있다. 죽은 자의 집은 우편물의 아지트다.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