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 이가을 시인

시의 사계

들 가운데 키다리가 / 신현득

들 가운데 키다리 미루나무,
-저건 누구네 논
-저건 누구네 밭
큰 키로 내려다보고 다 안다

-누구네 밭에 감자 심고
-누구네 밭에 땅콩 심고……
내려다보고 다 안다.

수남이네 아버지가 
일찍 일찍 들에 오시는 거
철수네 소가 쟁기를 잘 끄는 거
다 안다. 

일렁일렁,
바람 따라 몸짓을 하며, 키다리가
원두막 가에서 크는 수박을 세어본다.
참외도 세어본다.

 

이가을 시인
이가을 시인

[시 평설 - 이가을] 나 어릴 적 동네에도 키 큰 미루나무가 있었다. 온 동네 울타리에 앉은 키 고만고만한 사철나무와 여름이면 눈 환히 밝히는 새빨간 장미가 예뻤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고개 돌리면 눈이 닿는 미루나무는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마르고 키가 커서 별명이 꺽다리인 나와 어찌보면 닮았다. 

미루나무는 시골 동네마다 한 그루씩 있었다. 위의 동시처럼 조용히 동네를 내려다보면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보고 논에 벼가 익는 것을 보고 달맞이꽃 패랭이꽃 피는 것과 어느 집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까지 보았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이파리들은 눈동자처럼 동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등잔불 켠 동네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골목까지 환해진 동네를 나무는 더 멀리까지 집 안팎을 더 잘 보았을 것이다. 오래 거기에 지금도 서 있을 텐데… 

버스 편에 안부라도 물을까. 버스는 매일 그 나무를 스쳐 갈 것이다. 이젠 늙고 키가 꾸부정했겠다. 나처럼 귀도 눈도 침침해졌을 텐데 이파리라도 닦아주고 돋보기라도 맞춰 줄까. 나는 키가 조금쯤 줄었다. 나무도 키가 줄었겠다. 올 여름 더 멀리 보려고 목을 빼진 않을까. 안경 쓴 미루나무를 상상해 보는 하루, 추억은 덤이다. (이가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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