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호 변호사(전 법무연수원장, 전 대전지·고검장)

지난 토요일 어느 분이 일요일에 무엇을 하냐고 물었습니다.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보러 갑니다." "지난주 월요편지를 보니 발레 [안나 카레니나]를 보셨던데 정말 발레에 빠지셨나 봐요." 이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일 김기민이 나오나요." 저는 흠칫했습니다. 김기민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김기민이 누구예요." "한국인 최초로 마린스키 발레단 남자 수석 무용수가 된 사람이에요. 요즘 아이돌 가수만큼 인기가 높아요." 졸지에 발레 마니아에서 무식쟁이로 전락하였습니다.

어제 오후 2시 오페라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만석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대화에 '김기민'이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날 공연에 김기민이 출연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니 김기민 자체를 몰랐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혹시 김기민이 오늘 출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프로그램 북을 사면서 물었습니다. 다행히 오늘 김기민이 출연하는 날이었습니다. 프로그램 북을 통해 줄거리와 관전 포인트를 알게 되었고, 공연 후 인터넷 지식을 보태니 월요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는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막 1장 지그프리드 왕자의 생일날, 손님들은 왕자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어머니인 여왕은 석궁을 선물하며 내일 있을 왕실 무도회에서 신붓감을 정하라고 강요합니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왕자는 공원에서 머리 위로 날아가는 백조 무리에 홀려 숲 속으로 따라갑니다.

2장 백조를 쫓아 숲으로 온 왕자는 백조들이 사람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중에 특별히 아름다운 한 여인, 그녀는 공주 오데트입니다. 나머지 백조는 시녀들. 마법사의 저주로 낮에는 백조로 살다가 밤에만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그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 한 사람의 변치 않는 사랑뿐. 왕자는 오데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2막 3장 궁전 무도회장, 왕자는 신붓감을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오데트 생각뿐. 각 나라의 무희들이 아름다운 민속춤을 춥니다. 손님이 등장하였습니다. 마법사와 딸 오딜입니다. 마법사는 오데트에 빠진 왕자의 마음을 알고 딸 오딜을 오데트로 변신시켰습니다. 왕자는 이에 속아 오딜을 신부로 맞습니다. 그때 창밖에 백조 무리들이 날아갑니다. 속은 것을 안 왕자가 호숫가로 갑니다.

3막 4장 호숫가에서 오데트는 백조들에게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왕자가 용서를 빌며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마법사가 방해를 합니다. 왕자와 마법사의 결투. 왕자는 마법사의 날개를 꺾어 악의 힘을 이겨내고 솟아오르는 태양과 함께 오데트와 시녀들은 사람으로 돌아옵니다.

누구나 어릴 때 들어본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스토리에 음악과 춤을 삽입하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레가 탄생하였습니다.

사실 [백조의 호수]는 1877년 초연되었으나 실패합니다. 18년 후 전설적인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바가 재안무하여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한 것이 대히트를 쳤고 이것이 오늘날 [백조의 호수]입니다.

1장은 생일날답게 화려한 춤이 연이어집니다. 의상도 춤도 이렇게 다양할 수 없습니다. 눈요기로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2장에서 드디어 백조들이 등장합니다. 하얀 의상을 입고 백조처럼, 아니 백조가 되어 춤을 춥니다. 몸짓 하나하나에서 가련한 신세의 슬픔이 묻어납니다. 백조들은 그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킵니다. 슬피디 슬프지만 청백의 얼음처럼 아름다운 장면이 숨을 멎게 합니다.

수십 마리 백조들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줄지어 선 가운데 왕자와 오데트 공주는 운명적인 만남을 합니다. 그들의 2인무는 백조의 호수 중에 유명한 장면입니다. 이어 4마리 백조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팔짱을 끼고 한 몸처럼 좌우로 이동하며 발끝과 시선만으로 백조 특유의 몸짓을 구성합니다. 자칫 슬프기만 한 장면에 잔재미라는 요소를 집어넣어 관객들에게 잠시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백조 수십 마리가 추는 춤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호수에 떠 있는 백조도 이리 아름답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아하게 물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기는 하지만 [백조의 호수]의 백조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니까요. 오데트가 춤이 끝나고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합니다. 양팔을 뒤로 뻗고 몸을 낮춘 채 한 마리 백조가 되어 몸으로 애절한 호소를 합니다. "저를 구해주세요. 이 마법에서 풀어주세요. 누가 저에게 영원한 사랑을 주실 건가요."

3장은 다시 화려함 그 자체입니다. 무도회장답게 각 나라의 춤들이 소개됩니다. 1장의 생일날 춤보다 종류도 다양하고 규모도 훨씬 큽니다. 춤 전시장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3장의 클라이맥스는 오딜의 등장입니다. 오딜은 오데트와 같은 발레리나가 춤을 춥니다. 이것이 백조의 호수의 묘미입니다. 같은 발레리나가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을 동시에 춤춥니다. 흑조는 백조의 청순함 대신 요염함을 지녔습니다. 드디어 흑조는 절정의 춤을 추며 왕자를 유혹합니다.

그 유명한 32회전 푸에테(32 fouett? turns)입니다. 무용수가 한쪽 발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다리로 회전을 하는 고난도 기법입니다. 이 춤에 유혹되어 왕자는 오딜과의 결혼을 선언합니다. 누구라도 유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관객들은 회전 숫자를 맞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유튜브에서 [swan lake ballet fouettes]로 검색하시면 다양한 발레리나의 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저절로 박수가 나올 것입니다.

이 춤은 이탈리아 발레리나 피에리나 레냐니가 발레 [신데렐라]에 처음 선보인 것을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백조의 호수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초기에는 오데트와 오딜을 다른 발레리나가 춤추었는데 피에리나 레냐니가 백조의 호수에 출연할 때 두 역을 동시에 하면서 그 후 백조와 흑조를 동시 공연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 뉴스를 검색하니 이번 공연은 뒷말이 좀 있었네요. 마린스키 발레단 내한 공연이지만 프리모스키 스테이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마린스키 극장 소속 마린스키 발레단은 1783년 설립된 세계 최정상의 발레단인 반면 프리모스키 스테이지는 마린스키 극장이 한국 일본 중국의 발레 팬을 겨냥해 2016년 블라디보스크에 만든 마린스키 극장의 분관으로 이번 무용수들은 그 프리모스키 스테이지 소속이었기 때문에 마린스키 발레단이 맞냐는 설왕설래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마린스키 극장 소속 수석 무용수 김기민과 빅토리아 테레시키나가 출연함으로써 그 시비는 무색한 것이 되었습니다. 어제 공연은 운 좋게도 이들이 출연한 공연이었습니다. 김기민은 5년 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여 4년 만에 수석 무용수가 되었고 작년에 발레계의 아카데미 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를 한국인 발레리노 최초로 수상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유명인사를 이름도 몰랐던 것입니다.

발레에 입문하고 점점 그 세계로 빠져들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세상에 많은 분야 중에 우리가 접하지 않아 매료되지 않는 분야가 얼마나 많을까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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