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내 이름은 폴 블릭이다. 나이는 54세, 삶에 대한 두 가지 전망 사이에서, 모순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망설이는 거북한 나이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에는 세월에 따라 주름이 늘어간다. 규칙적으로 칼슘과 협심증 치료제를 복용하고, 다 그렇듯이 담배를 끊었다. 나는 혼자 살며,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늙어간다. 두 아이와 손자를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지만 말이다. 손자가 어린 나이(이제 곧 다섯 살이 된다)인데도 나는 이따금 그 아이의 얼굴에서 형에게서 보았던 어떤 표정을 발견한다. 뱅상이 길지 않은 삶을 통해 드러내 보였던 그 확신과 침착함 또한 발견한다. - 장폴 뒤부아. 장편소설『프랑스적인 삶』1. 샤를 드골(1958년 1월 8일-1969년 4월 28일)

레이블링 게임Labeling Game-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산하의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트렌드 코리아 21』에서 새로운 용어 10가지를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새해 띠의 동물과 연관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경기와 소비 동향을 예측하는데 15년째 발간되고 있다. 소의 해인 올해는 ‘COWBOY HERO’로 카우보이가 야생의 소를 길들이듯 코로나 19 팬데믹 위기에 대응하자는 전략이 담겼다. 그중에서 집콕.방콕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누구인가’ 그 정체성 찾기의 ‘Real Me: Searching for My Own Label’의 앱관련 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나만의 꽃 심기’, ‘꼰대 레벨 테스트’, ‘대학교 학과 테스트’, ‘샌들로 성격 테스트 ’ ...

자기진단 검사에 증강현실, 3D 등 디지털 신기술을 결합시키는 첨단기업이 큰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 바로 게이미피케이션인데 게임의 전달, 행동 및 관심의 메카니즘을 소비패턴에 연결하는 방식이다. 소비자별로 계량화–비유화–공유와 인증을 거치면서 특정 상품으로 유도하는 새로운 시장.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기적 피로사회가 심화될수록 이런 신규 분야가 호황을 맞을 전망이다. 우리는 코로나 19의 사회적 거리두기- 그 뉴노멀의 비대면이 또 다른 집단적 대면, 상품화를 불러오는 ‘웃픈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튼 ‘놀면 뭐하니?’- 심심풀이 땅콩 그 파적 삼아 심리학자 메그 애롤 박사가 영국 성인 2,000명을 설문한 결과지에 한번 자신을 투영해 보시기를 권한다. 일종의 ‘꼰대 테스트’인데 정체성의 단면을 찾아낼 수도 있다.

1.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몸을 굽힐 때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낸다 2. 옷이나 신발은 멋보다 편안함으로 선택하고, 시끄러운 곳을 피한다 3. 술을 이기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의 주량을 알게 된다. 한두 잔에 곯아떨어지는 경우도 잦다 4. 젊은 후배들끼리 하는 말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카세트 테이프’가 뭔지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5. 경찰·군인·교사·의사가 모두 앳되게 보인다 6. 뮤직비디오는 하나같이 야하게 느껴진다. 7. 유행하는 ‘톱 10’ 노래들 중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8. 불평을 많이 하게 된다 9. 날씬한 허리와 넓은 마음이 뒤바뀌어 뱃살은 넓어지고, 마음이 옹졸해진다 10. TV에선 왜 쓰레기 같은 것만 하냐며 궁시렁거리다 그 앞에서 잠이 든다 11. TV보다 라디오를 선호하게 된다 12. 운전은 1차선을 피해 중간 차로를 이용한다 13. 화분이나 정원 가꾸기에 재미를 붙인다. 14. 주말에도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늦잠보다 걷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다. 15. 남몰래 휴지를 준비해서 갖고 다니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내가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라고 생각하거나, 엉겁결에 내뱉은 적이 있는가? 애롤박사는 그렇다면 중년과 노년 그 꼰대가 되었다고 수긍해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런데 영국인의 설문 결과 남성은 평균 48세, 여성은 45세를 중년의 이정표로 여기는 것으로 조사됐다. 응답자들은 대체로 그 나이 즈음에 자각 증상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한편 10명 중 1명은 너무 젊은 나이라며, 중년의 갈림길은 50대 후반이라는 의견도 나타냈다. ‘오후’를 ‘오십 살 이후’의 준말이라고 이해한다면 지극히 온당한 지적이다.

애롤 박사는 “어쨌든 실제 연령을 불문하고 나이 들어감의 가장 큰 징후와 주요 조짐은 앞선 결과 그대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숫자가 아니고 그저 단어일 뿐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숫자도, 단어도 아니고, 개개인의 태도와 마음 상태에 달렸다” 덧붙이며, “인생의 각 연령대와 단계에는 나름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며, “행복한 삶의 비법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그때 그걸 찾아내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나 역시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의 성장을 보지도 못하고, 지나간 그 시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굳이 정상을 참작한다면 내 아들과 딸이 특별히 학교에서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크게 건강을 염려하지 않아도 봄에 자라는 풀처럼 쑥쑥 잘 자랐다고 강조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순리에 따라 운하의 수문 사이를 뛰어넘고, 잔잔한 강물처럼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치부해온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당시에 나는 어리석게도 아이들과 늘 가까이 있고, 기꺼이 마음을 쓰는 아버지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이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이들과 중요한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에게서 삶을 혼란스러워하는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았다. - 장폴 뒤부아. 장편소설『프랑스적인 삶』7. 프랑수아 미테랑 2(1988년 5월 8일-1995년 5월 17일)

우상이었던 형과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을 차례로 겪고, 다른 환경에서 자란 여인을 사랑하다가 배신의 상처를 안게 되고, 정신병을 앓는 딸을 온전하게 되돌리려는 54세의 폴 블릭- 프랑스 제4의 도시 툴루주 출신의 장폴 뒤부아(1950- )는 400 쪽에 가까운 이 소설에서 한 사내와 국가의 운명- 그 행복과 불행을 회상하고 있는데 곧 자화상이다. 정치적 성향은 아나키스트 편에 가깝지만 일개 국민, 시민으로서 대통령의 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에 프랑스적인 삶이다.

‘사회적, 정치적 동물’들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04년의 저본을 이듬해에 우리말로 번역.출판했으니 양국의 대통령도 몇 대代나 바뀌었다. 승리와 패배- 그 어느 당을 찍거나, 포기한 투표행위는 족쇄로 작용해 재임 내내 인간적으로 예속당하는 것이다. 여기에 국내외의 전쟁은 또 다른 증후를 촉발하는 중요한 인간적 혼돈이다.

하느님, 저에게 /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 바꿀 수 있는 용기와 / 언제나 그 차이를 / 분별할 수 있는 / 지혜를 주소서 – 커트 보니것. 장편소설『제5 도살장』3

미국의 커트 보니것(1922-2007)는『제5 도살장』첫 장에 부제로 ”혹은 소년 십자군 죽음과 억지로 춘 춤‘을 명기하고, 다음과 같이 자술했다. ”오래전 전투력을 상실한 미국 보병 정찰대원으로서, 전쟁 포로로서,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부르는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했고, 또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비행접시를 보낸 트랄파마도어의 행성 이야기들을 약간 전신문체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다. 평화를.“

보니것은 1945년 2월 13일부터 이틀간 자행된 연합군의 독일 드레스덴 폭격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소나 돼지 등 가축이 살육되었던 임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는 24년 뒤 그날의 전율을 소설로 풀어냈다. 참전 그와 다른 축으로 낯선 행성의 외계인을 등장시켜 지구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신랄하게 고발한 것. 특정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훗날 태양계의 다른 행성 어느 사람들이 또 읽을 수도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이는 곧 숱한 무명의 전사들이 내몰려, 스러져간 그 시대적 고통과 불행을 결코 반복하지 말라는 전갈이다.

서울과 부산 시장을 선출하는 4.7 보궐선거가 끝난 지난 주말- 63세의 아들은 93세의 아버지를 모시고 ’세종특별자치시‘를 둘러보았다. 1971년 그러니까 정확하게 반세기 그 50년 전 부자는 그곳 금남면의 소재지인 용포리에 살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우체국장이셨고, 외아들은 금호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해 4월 12일 제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는데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간의 피말리는 접전이었다.

여하튼 나는 관사에서 십여 리 떨어진 금강변의 중학교를 오갔는데 미술과 음악에 관심이 많았었다. 2층 복도 끝 양편으로 나란히 붙은 특별활동실을 도맡아 청소하며 내다보는 대평리 평야는 나만의 비밀스런 최애의 뷰였다. 새파란 모가 물결치며 자라는 들판은 금강물로, 하늘로 이어져 무한히 짙푸르렀다가 황금색으로 변했고 종당에 눈발이 분분한 설원으로 치환했었다.

아니! 이렇게 변할지는 몰랐네... 6.25 참전용사 단체에서 2006년인가 공사 초기에 왔었는데... 부친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시며 상전벽해- 빼곡한 아파트와 웅장한 S자 정부청사 그 ’뽕나무밭‘에 놀라셨다.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는 ’세종장영실고등학교‘로 바뀌었구만. 이쯤에 우시장이... 저 언덕에 네 엄마가 다니던 교회가 있었는데 크게 신축했고. 그렇지, 파출소와 농협 지나면 내가 근무하던 우체국이지... 아버지의 기억 그곳마다 까까머리에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중학생이 웃고 있었다. 대통령의 선거공약으로 등장해 헌법재판소에서 ’불문법‘으로 기각되었다가, 치열한 당파적, 선거적 계산을 거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신도시- 여기 취재 많이 왔었지?

그렇다. 1987년 1월 2일부로 대전MBC TV편성부 수습PD로 시작한 방송생활- 주말이면 시외버스를 타고 유성온천으로 목욕을 다니던 한 소년의 그 거주지를 어찌 잊겠는가. 원주민들의 보상과 이주, 해발 259m 전월산의 노고 봉수대,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환경평가, 1번 국도의 금남대교 위 아래로 놓이는 대형 교량... 행정수도의 조속한 추진을 위한 토론프로그램은 물론 ’행정중심‘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여러 단계의 건설과정을 프로그램으로 다루었었다.

무엇보다 세종시 종촌면 국교리에는 한 문학청년이 학적변동으로 1982년 3월 11일 강제 징집되어 입소한 육군 제32사단 신병훈련소가 있다. 1950년 7월, 이 금강변 대평리전투가 치열했는데 많이들 전사했지... 88세를 일기로 온 그곳 본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살아생전 모시고 들르던 장어맛집에서 점심을 하고, 차를 마시는데 금강을 굽어보셨다. 한국전쟁이 휴전되었지만 제대가 미뤄져 특무상사까지 도합 5년간 복무한 역전의 용사- 저 인도의 고대 경전『우파니샤드』에 나오는 경구일 것이다.

가르기여. 하늘 위라는 것, 땅 아래라는 것, 하늘과 땅 사이라는 것, 이 하늘과 땅이라는 것,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허공에 날줄과 씨줄로 엮여 있다오... 강들이 흘러 이름과 형태를 버리고 바다에 잠기듯이, 그렇게 지혜로운 이는 이름과 형태에서 높고도 성스런 뿌루샤purrusa(인아人我)에게로 다가 간다네.

1929년생 친부의 어깨에 신축년 2021년의 늦은 봄 햇살이 내려앉는다. 한 세대 30년 뒤 1959년 출생의 한 중학생이 나비와 함께 집으로 간다. 흐르고 흐르는 비단 물결 그 강변의 일이다. 이제 1989년 태생의 아들과 2017년에 첫울음 터뜨린 손자와 함께 찾을 터. 아버지가 낳은 아들 아빠, 할아버지, 회두리에 증조부라고 호명될 무렵, 아니 그 전에라도 그 이름 다 잊고 바다에 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열자의 언표대로 ”죽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가는 것“이므로 말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랴? 천하가 같이 돌아가지만 길이 다르고, 일치하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하니,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걱정하랴? 해가 가면 달이 오고, 달이 가면 해가 온다. 해와 달이 서로 추진하여 밝은 빛이 생긴다. 추위가 오면 더위가 오고, 더위기 가면 추위가 온다. 추위와 더위가 서로 추진하여 해가 이루어진다. 가는 것은 굽히는 것이요, 오는 것은 펴는 것이다. 굽히고 펴는 것이 서로 느끼어 이로움이 생긴다. 자벌레가 굽히는 것은 펴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요, 용과 뱀이 엎드려 있는 것은 몸을 보존하려 하기 때문이다.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

부디 여여 생생 무탈한 만춘의 나날들 이어가시길 비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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