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信不立(무신불립),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의 ‘황제 조사’ 의혹으로 곤궁에 처한 김진욱 공수처장이 현재 상황과 딱 들어맞는 말이다.

공수처는 출범 이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패스트트랙 상정으로 인한 여야의 첨예한 대립으로 국회 본회의 통과부터 시끄러웠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에 대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초헌법적인 기관으로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패스트트랙 통과 당시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으로 인해 현직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여야 전·현직 의원들이 피고인으로 재판에 회부하게 만든 기관이기도 하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지난 1월 21일 공식 출범한 공수처의 首長(수장)인 김 처장이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 불법 출국금지 의혹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황제 영접’하고 ‘황제 조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특히, 공수처는 문재인 정부의 1호 공약으로써 비대해진 검찰 권력을 견제하고, ‘살아있는 권력’을 성역 없이 수사하여 국민에게 속 시원한 법 집행을 보여줄 그야말로 상징적인 기관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공식 출범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김 처장의 이 지검장에 대한 처신은 국민들로부터 스스로 신뢰를 저버리고 말았다.

김 처장은 취임 이후 갈지자 행보로 인해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달 1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서는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 불법 출국금지 의혹 사건을 수원지검에 재이첩하면서 “수사를 현재 수사팀에서 계속하도록 하되 기소 여부는 저희가 나중에 판단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재량 이첩 발언으로 법조계와 학계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으며, 검찰 출신의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이 김 처장에게 “공수처에 사건 이첩 받은 직후에 이성윤 만난 사실 있죠? 조사도 했습니까?”라는 질의에 “변호인 통해서 면담 신청이 들어왔습니다. 면담 겸 기초조사를 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김 처장의 주장과 달리 공수처에서 수원지검에 재이첩한 서류에는 이 지검장의 면담 겸 기초조사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논란에 대해 김 처장은 “새로운 주장이 없어 기록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던 중 이 지검장에 대한 ‘황제 영접’과 ‘황제 조사’의 근거가 되는 CCTV 영상이 터진 것이다. 이 지검장의 공수처 출입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던 의혹에 대해 지난 1일 TV조선 단독보도로 CCTV 영상이 공개되면서 ‘황제 영접’ 논란은 이제 부인할 수 없게 됐다. CCTV 영상에는 이 지검장이 BMW 차량을 타고 공수처가 위치한 과천 법무부 청사까지 와서 김 처장이 보낸 관용차인 제네시스로 갈아타고 공수처로 들어가는 장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국민의 분노가 들끓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대변인실을 통해 “보안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김 처장의 해명을 지켜보면, 거대 권력기관 首長(수장)으로서의 위엄과 권위는 온데간데없고, 그냥 측은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공수처를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이는 김 처장은 이제 이성윤 지검장의 ‘황제 영접’을 기준으로 검사장급 이상의 직책은 처장 관용차로 모셔오고, 검사장급 이하의 직책은 차장 관용차로 모셔 와서 수사를 해야만 한다는 조롱을 받고 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 이 지검장의 ‘황제 영접’이나 ‘황제 조사’ 같은 것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공수처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아니라 고위공직자범죄보호처가 되지 않을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공수처는 대통령을 비롯한 ‘살아 있는 권력’으로부터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필수이며, 공수처장은 그 어떠한 외풍으로부터도 조직을 보호하여 법치주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해야만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이 지검장에 대한 ‘황제 영접’이나 ‘황제 조사’가 과연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유지했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1월 21일 취임사에서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철저히 지키고,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성역 없이 수사함으로써 공정한 수사를 실천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는 김 처장은 과연 자신의 행동이 취임사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국민들에게 낮선 공수처가 문재인 정부에서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정부에서도 중요 국가기관으로 확실하게 뿌리내리려면, 첫 단추를 잘 꿰어야만 한다. 하지만 無信不立(무신불립)을 자초한 김 처장의 이번 행태를 지켜보면서 공수처가 설립 취지와는 정반대의 행보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기관으로 머물 것 같다는 생각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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