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나무」전문

꼭 43년 전 ‘내일’ 박목월(1915. 1. 6.-1978. 3. 24.) 시인이 63년 전 오셨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동요「송아지」를 비롯한「나그네」와「윤사월」,「하관」같은 애송시로 ‘북의 소월, 남의 목월’이라는 찬사를 받는 대시인이다. 하지만 영부인 육영수의 개인 교사를 지냈고, 전기까지 집필해 ‘어용’ 시인으로 지탄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인문계열 78학번의 19살 새내기였다. 계열별 모집은 2학년부터 전공 학과를 정하는데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할 참이었다. 캠퍼스의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한 춘삼월 스무나흣날- 별세 소식을 접하고, 시인의 ‘여정’을 되밟아 보기로 했었다. 1964년에 발표된「나무」의 배경인 그 지명을 잇는 길 말이다.

1950-60년대 충남의 유성과 온양은 온천으로 유명한 신혼여행지였다. 박시인은 온천욕을 하거나, 문학 세미나 참석차, 개인적인 용무 그 어느 편을 목적으로 유성을 찾았을 터. 그런데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조치원에서 공주로, 공주에서 온양으로 돌고 돌아서 의아하다 여겼다. 지금이야 세종특별자치시를 중심으로 고속도로와 4차선 국도가 사통팔달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을 오갈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작정하지 않으면 ‘S’자로 ‘대덕군과 공주군, 아산군’으로 우회하기가 힘든 길이다. 왜 목월시인은 유성에서 곧바로 온양, 서울 길을 잡지 않았을까? 실제로 시인이 다녀간 뒤 20여 년 뒤였지만 나의 행로는 3일이나 걸렸었다. 그런데 아들인 박동규(1939- )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 평론에서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1964년 발간된『청담』이라는 시집의 첫 번째 시가「가정」이다. 자연과의 교섭을 통해 그가 기대고 숨 쉬던 상상적 공간이 가정이라는 생활공간으로 옮겨온 것을 보여주는 전기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가정」이라는 시에 관한 내용을 보기 전에 박목월시인이 처한 현실적 공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박목월시인은 가족(어머니와 12살의 나, 6살 여동생, 2살 남동생)을 서울집에 남기고 혼자 국군을 따라 내려갔다. 이 전란의 상흔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간이었다. - 박동규.「나그네에서 청담의 숨소리까지」(대학신문 특별기고: 2015년 5월)

박시인은 한국전쟁의 공군종군문인단 단원으로 참전해 그 참상과 공포를 직접 경험했고, 휴전 후에는 생활고를 겪은 시대의 증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경북 월성군 출생으로 대구 계성중학교 3학년 때 잡지『어린이』와『가정』에 동시를 발표해 아동문학가로 인정받았고, 1940년 정지용의 3회 추천으로『문장』을 통해 정식 등단했다.『청담』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3인 공동시집『청록집』(1946년) 이후『산도화』(1955년)에 이은 두 번째 개인 시집이었다. 제목『청담』을 한자로 풀어보면 ‘맑을 청淸, 흐릴 담曇’인데 불행의 연속인 양 흐린 잿빛 하늘에서 한 줄기 햇살 비추듯 ‘시대의 평온’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반영한 게 분명하다.

그런 시풍의『청담』에 수록된「나무」의 배경인 충남 지역 세 곳- 전후에 가장 번화한 온천 관광지 유성과 온양, 삼국시대 백제의 고도 공주, 충북철도가 시작되는 조치원이다. 이 시적 공간을 한국의 역사가 응축된 현장으로 삼기에 적절하게 여긴 듯하다. 장남의 회고대로 가장으로 궁핍한 살림살이에 시달리는 식솔들에게 면목이 없어서인지... 온천욕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한탄스러운 것인지... 일상의 생업 전선 그 서울로 돌아가기가 망설여져 일부러 발길을 돌리고, 또 돌린 것인지... 아직 산수유와 진달래, 산벚꽃 따위 봄꽃 피지 않아 외양이 선명한 나무들을 보고, 또 새기면서 걸었으리라.

지상에는 / 아홉 켤레의 신발 /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 내 신발은 / 십구문반(十九文半) /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 그들 옆에 벗으면 /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 귀염둥아 귀염둥아 / 우리 막내둥아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 여기는 지상 / 연민한 삶의 길이여 / 내 신발은 십구문반 //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 강아지 같은 것들아 /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 아니 지상에는 /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존재한다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가정」전문

1문이 24mm인데 ‘십구문반’은 468mm이니 아버지 신발로는 너무 과장된 시적 구사라 지적하지 말라! 전쟁 그 난리통에도 살아남은 아내였지만, 포성이 멈추고 애면글면 애쓰다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했지만, 땅 딛던 신발은 남아, 남편의 그것과 합쳐보니 꼭 그만한 길이가 된 것이다. 달동네- 굴욕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얼음과 눈으로 쌓은 판잣집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비추는, 꼬물꼬물 병아리 부화장처럼 걸린 백열등. 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의 명언일 것이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지대하다!” 그렇다. 거대한 냉전 이데올로기의 충돌에서 산하의 ‘나무’인들 온전했으랴. 이제야「나무」라는 목월의 시 한 편이 오롯이 이해가 간다.

나무는 우듬지 높이만큼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고, 펼친다 했다. 그렇게 새순 내고, 가지 키우며, 꽃 낸 자리에 열매 맺는 나무들은 죄다 다른 모습이다. 몇몇 나무는 수도승처럼 우뚝 묵중하고, 고만고만한 나무들이 멍청하고 어설프게 동네라는 숲을 이루지만 눈보라와 삭풍에 떨고, 산마루의 몇 그루는 하늘 문 지키는 파수병인 양 외로운 땅의 들과 산이다. 묵중하고, 침울하고, 고독한 그 나무들은 바로 목월시인이 본 전후시대에 각기 다른 형편과 처지에서 살아내는 군상들 그대로다. 누구나 편견과 아집 없이 세상을 유심히 관찰한다면 시인처럼 뽑아낼 수 없는 ‘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 그런 마음 가진 이들 여럿이 함께 모이고 모이면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내 결코 보지 못하리 /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 단물 흐르는 대지의 가슴에 / 입을 대고 젖을 빠는 나무 // 온종일 하느님을 바라보며 / 잎 무성한 두 팔 들어 기도하는 나무 // 여름이면 머리칼 속에 / 울새의 보금자리를 지니는 나무 // 그 가슴 위로는 눈이 내리고 / 비와 정답게 사는 나무 // 나 같은 바보도 시를 쓰지만 / 신 아니면 나무는 만들지 못해 - 킬머.「나무」전문

미국의 알프레드 조이스 킬머(1886-1918)는 뉴저지주의 뉴 브룬수윅 출신으로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였다. 그는 창조주에게 무한히 겸손한「나무」처럼 아름다운 시 32편의 시를 남기고거짓말처럼 32살에 이승을 등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마른의 제2차 전투에서 전사한 것인데 프랑스 무공 십자훈장을 추서받았으며, 전쟁에 파괴된 낭만적, 시적 이상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봄철이면 이 시를 톺아 읊으며, 한뉘를 정성껏 신실하게 순명하며 살자 다짐해왔다.

지난주 토요일 20일이 춘분春分이었는데 24절기의 네 번째다. 한 철에 6개씩 사철의 그것이니 새봄도 어느덧 중춘을 넘었다. 1960년대 아버지께서 우체국장으로 근무하셨던 충남 공주군 사곡면에 소재한 마곡사麻谷寺-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그곳에서 다녔는데 단골 소풍지였다. 학교의 단체 소풍은 물론 우체부 아저씨들 야유회도 줄곧 그 절집으로 다녔던 것. 3월 24일- 박목월의 43주기를 앞두기도 했고, 올해 내 나이가 63세로 영면한 박시인의 향년과 똑같아서 유년의 놀이터를 찾아보자는 심산이었다.「나무」의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은 사곡 다음 면인 유구에서 시작되어 정안을 거친다. 온양에서 정안을 거쳐 태화산을 넘어 마곡사로 가는 길도 있지만 험한 산길이어서 박시인의 길을 되밟았다. 자발적 동안거의 충북 영동에서 해제 축원겸 대전과 유성, 공주를 거쳐 마곡사를 찾은 것이다.

춘분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들고, 한 해 동안 아픈 이가 드물다 했던가? 태화산마곡사 그 일주문의 낙숫물을 손바닥에 받다가 연잎인 양 우산을 쓰고 걸었다.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봄철 풍광은 태화산의 마곡사가 그만이고, 가을은 계룡산의 서편 갑사가 최고라 했는데 아직 계곡은 겨울철 옷을 한풀 벗지 못했다. 새뜻한 봄바람에 새싹이 일렁거리며 윤슬의 빗방울을 연신 떨구었다. 계곡을 끼고 걸어가자 해우소, 종루, 탑, 대웅전이 차례로 보이고, 이내 해탈문에 당도했다. 부처님의 나라 그 불국을 지키는 금강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지나친 저 유년의 기억이 당간의 탱화처럼 펄럭거렸다.

나는 진정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동승 같던 시절에서 얼마나 멀리 왔으며, 과연 잘 살아낸 것일까? 박목월시인이 보았을 그 ‘나무’들은 시절과 세월 따라 얼마나 또 크고 튼실해졌을까? 극락교를 지나자 대웅전 경내에 내걸린 연등들이 보였다. 코로나 19로 힘겨운 시대를 견뎌내는 사부대중들이 이렇게 일찍, 많이들 달았을 터. 부처님의 가피를 발원하는 백열등 닮은 연등이 비바람에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 불현듯 순우리말 ‘나무’가 “나我는 없음의 그 무無”로 돌아가 부처에게 의탁한다는 뜻이겠다 싶어 무르팍을 쳤다.

목월시인이 “이녁의 심전心田- 그 마음의 밭에 나무 몇 그루 심었으니 참 잘된 일이다.” 라며, 나의 정수리를 매만지신다. 오규원(1941-2007) 시인도 가만가만 나의 손바닥에 시 한 편을 적어주신다.

물의 눈인 꽃과 / 물의 손인 잎사귀와 / 물의 영혼인 그림자와 / 나무여 / 너는 불의 꿈인 꽃과 / 이 지구의 춤인 바람과 / 오늘은 어디에서 만나 / 서로의 손가락에 / 반지를 끼워주고 오느냐 – 오규원.「나무에게」전문

사람 같은 나무, 나무 같은 사람- 저 선종의 1대 조종 달마대사가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 대답을 듣고자 했다. 그래 나하고 공부하면서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고? 깜냥껏 말씀들 올리는데 회두리에 도육이 말한다. 사대四大가 본래 공空한 것이니 소승이 보기에는 한 법도 얻은 바가 없사옵니다... ‘사대’는 불교에서 일체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네 가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칭한다. 도육은 그것마저도 철저하게 부정해버렸다. 긍정의 긍정이 부정을 부른 것.

훗날 육조 혜능이 10자로 옴짝달싹 못하게 묶었다. “본래무일물 / 하처야진애 本來無一物何處也塵埃: 본디 공해서 그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 때가 끼고 먼지가 앉는다 말인가!” 여기에서 주목해 새겨야 하는 경구가 바로 앞의 전제 그 10자이다.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아니요: 菩提本無樹 / 마음 또한 틀 위에 놓인 것이 아니다: 明鏡亦非臺” 무수이니 나 또한 없는 나무이런가? 귀갓길에 개인 서쪽 하늘의 저녁놀이 붉디붉었고, 내 그림자는 없어졌다, 목월시인의 ‘나그네’처럼 달빛 받으면 또 생겨나리라, 외줄기 그 길 닮은 나무의 그림자가.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리 / 술익은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박목월.「나그네」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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