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민주의거 기념 인터뷰 '최우영 유공자'를 만나다

최우영 3·8 민주의거 유공자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뉴스티앤티
최우영 3·8 민주의거 유공자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뉴스티앤티

<편집자주> 지금으로부터 61년 전 1960년 3월 8일, 대전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학생들의 강력한 외침이 있었다.

바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8 민주의거'다.

'3.8 민주의거' 기념일을 맞아 당시 학생 시위에 참여했던 최우영 3·8 민주의거 유공자를 만나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들어보고, '자유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본다.

 


3.8 민주의거가 일어난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1960년 당시는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부정선거도 만연했던 시기였다. 또, 그 시절의 고교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였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이반되는 사태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들은 사실상 자유당의 홍보지였던 서울신문을 강제 구독해야만 했다. 특히 제4·5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둔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의거가 발생한 뒤부터 일요일 강제 등교를 실시해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학원 내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고자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3·8 민주의거는 어떻게 준비되었나?

그 시절, 새학기는 4월에 시작됐다. 때문에 3학년은 졸업해서 없었고 학교에는 1, 2학년만 남아있었다.

대전고등학교는 학생 간부라 할 수 있는 ‘학도호국단’이 앞장서 3.8 민주의거를 준비했다.

이들은 시위 전날 시내에 모여 사전모의를 진행했다. 학도호국단은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연설회에 맞춰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다음 날 비밀이 누설되면서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학교 맞은편 교장관사에 연금됐다. 그러나 이들은 점심시간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교실로 돌아왔고, 본격적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행진하는 대전고 학생들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행진하는 대전고 학생들

3·8 민주의거의 전개 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재학생 모두는 교문을 박차고 담장을 넘어 큰길로 뛰쳐나와 대오를 갖추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구호는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견한다”,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배격한다”,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생동태 감시를 중단하라” 등 이었다.

경찰들은 바리게이트를 치고, 학생들을 막았다. 경찰봉과 카빈소총의 개머리판을 학생들에게 휘두르기도 했다.

학생들은 시위 중간에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지만, 역전 왕생백화점 부근에 도착했다.

경찰들은 목척교에서 도청방향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최후저지선을 치고 포진하고 있었다.

결국, 중교와 선화교로 우회해 학교로 돌아와 농구장에 모여 연좌농성을 이어갔다.

 


민주의거 전개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도 있었나?

당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끌려간 학우 80여 명과 조남호, 금종철 선생님이 구금돼 돌아오지 못했다.

늦은 저녁 교장과 경찰서장은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와 끌고 간 선생님과 학생들을 선처해준다고 했다. 오후 9시경 연행됐던 학우들이 석방됐고, 주동학생들은 자정을 넘겨 귀가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매일같이 경찰서로 소환돼 배후를 밝히라고 협박을 당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밝힐 배후라 할 것이 없었다.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됐나?

경찰은 초비상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각 학교는 돌연 기말시험을 예정보다 앞당겨 학생들의 관심을 분산시켰다.

또, 연쇄적인 연합시위를 우려했던 경찰은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 또는 예정자들의 주소를 입수하여 9일 밤부터 일제히 연행해 회유하고 협박했다.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1, 2학년 재학생 600여 명은 조회시간을 틈타 시위에 돌입했다. 대전경찰서에 학우들이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구속된 학우들의 석방을 위해 “자유수호, 민주사수,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대전우체국과 목척교 인근에서 경찰과 크게 충돌했다. 일부는 대전경찰서까지 진출했다.

경찰 측은 10일 오전에 교장을 통해 학생들의 구금을 풀어줬다고 주장했으나 확실친 않다.

 

동아일보 3월 9일자 보도
동아일보 3월 9일자 보도

3·8 민주의거의 영향은?

당시 신문의 사회면에 대서특필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가장 큰 규모의 준비와 체계까지 잡힌 최초의 시위였기 때문이다.

3·10 의거는 같은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학생시위가 확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국내 최초의 기록이 됐다. 이후 4·19 혁명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다.

대구 2·28, 대전 3·8, 마산 3·15에 이어 4·19 혁명까지 모두 고교생에 의해 시작됐다는 특징이 있다. 기반에는 대한민국 민주헌법에 대한 교육이 있었으며 결국 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동안 3·8 민주의거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해오셨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지난 2000년 사단법인 3·8 민주의거 기념사업회가 설립된 이후, 2003년부터 공동의장을 맡아 9년간 활동했다.

활동 기간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자료 발굴이었다. 정부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학생운동을 전부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간지 및 서책을 확보하고, 자료집과 증언록을 만들어 3·8의 기억과 역사를 되찾는 데 노력했다.

지금까지 의거에 참여한 6개 학교 24명의 유공자 증언을 실었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추가할 예정이다.

 

최우영 3·8 민주의거 유공자
최우영 3·8 민주의거 유공자

최근 대전시가 3.8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고 했다. 기대되는 사업이 있다면?

단연, 3·8 민주의거 기념관 건립 사업이다.

기념관 건립 이야기는 수년 전부터 있었다. 정권이 계속 바뀌면서 지지부진했으나, 허태정 대전시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마침내 대상지가 선정됐다. 오는 2024년 개관한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학생들에게 3·8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과 강의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늘 사회에 대해 깨어 있고 관심을 두었으면 한다.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3·8 민주의거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느끼는 바가 있으면 한다.

학교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공간이 아니다. 3·8 의거는 정의로운 민주질서가 실천되지 않는 사회라면 발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전고등학교 3·8 민주의거 기념비에 적은 글 중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기를 거쳐가는 대능의 젊은이여,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그날의 용기를 되새겨 항상 께어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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